길위의단상

한 장의 사진(32)

샌. 2022. 4. 18. 08:17

 

살다 보면 누구나 삶의 분기점을 통과한다. 짧은 인생이지만 몇 번의 고비가 있고, 경우에 따라서는 험난한 봉우리를 넘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봉우리인지는 넘을 때는 잘 알지 못한다. 세월이 흐르고 지나온 길을 멀리서 조망하게 될 때 삶의 매듭이 어떤 의미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긴 능선길을 걷고 나서 뒤를 돌아볼 때 지나온 산봉우리들의 모양과 높이를 알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나에게도 몇 차례 파고가 밀려왔는데 그중 하나가 30대 중반에 경험했던 디스크 수술이었다. 아마 1986년이었을 것이다. 지금은 디스크 수술이 간단하지만 - 수술이 아니라 시술이라 불릴 만큼 - 그 시절에는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허리를 절개하고 칼로 디스크를 잘라내는 재래식 방법밖에 없던 때였다. 수술 후 재발하는 경우도 많았다.

 

디스크 수술을 위해 나는 20일이 넘게 병원에 입원해야 했다. 처음 다리 통증이 찾아왔을 때 디스크가 원인이라는 것을 모르고 침과 한약 치료를 받았다. 그리고 운동 부족이라면서 과하게 운동 요법을 썼는데 이것이 증상을 더 악화시켰다. 나중에는 10분 이상 서 있을 수가 없었고, 버스에 타도 바닥에 주저앉아야 했다. 서울대병원에 입원하고 수술에 들어가기 전 신체검사를 받았는데 간 기능에 문제가 있어 정상으로 돌아올 때까지 열흘 정도 기다렸다. 의사 말로는 한약이 원인이라 했다.

 

수술 후에도 바로 퇴원하지 못하고 증상의 변화 여부를 체크하기 위해서 병원에 상당 기간 있었다. 퇴원 뒤에는 여름방학이 시작되어서 직장에 나가지 않고도 집에서 쉬면서 조리를 할 수 있었다. 당시는 가락동 시영아파트에 살았는데 낮에는 아이들과 함께 집에서 가까운 탄천 둑방을 조심하며 산책했다. 이 사진은 그때 찍은 것이다. 아이들은 아직 유치원에 다니기 전이었을 것이다.

 

사진에 보이는 다리가 가락동에서 수서로 넘어가는 탄천교다. 그 당시 만들어진지 얼마 안 됐다. 지금은 수서가 서울의 부도심 지역이 되었지만 그때만 해도 드문드문 시골 마을이 산재한 촌이었다. 탄천도 전혀 사람의 손을 타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이었다. 가장이 몸을 제대로 거동을 못하니 멀리 나가지는 못하고, 집 가까이 있는 탄천 주위를 어슬렁거릴 뿐이었던 1986년의 여름이었다. 허리 지지대를 차고 있어서 쭈그려 앉은 자세가 어정쩡하고 표정도 어둡다.

 

2학기가 시작되면서 학교 앞에 셋방 하나를 얻어서 아내와 둘이 거처했다. 세 시간 넘게 버스 안에서 흔들려야 하는 출퇴근의 위험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아이들은 시골 어머니한테 보냈다. 수술 후 조리는 완벽하게 한 셈이었다. 그 덕분인지 수술의 후유증은 생기지 않았다.

 

복기를 해 보면 당시는 디스크에 대해서 너무 무지했다. 허리 근육을 강화한다고 테니스를 평시보다 더 심하게 쳤다. 이미 디스크가 돌출한 상태에서 미련한 짓이었다. 치료는 한의원에서 침과 한약으로 했다. 이 역시 추간판의 물리적인 이상을 제거하는 데는 맞지 않았다. 병을 스스로 악화시킨 셈이었다. 신경외과를 찾아갔을 때는 이미 수술 외에 다른 대안이 없었다.

 

디스크 수술을 하면서 내 생활은 확연히 달라졌다. 부어라 마셔라 하던 술버릇이 없어지고 퇴근하면 바로 집으로 들어가는 모범가장이 되었다. 술 취해서 비틀거리는 행동은 절대 금지였다. 하루 한 갑씩 피우던 담배도 반으로 줄었다. 인생사가 전화위복이고 새옹지마라는 옛말이 나한테도 그대로 들어맞았다. 만약 디스크가 아니었다면 나는 다른 식으로 몸이 망가져 더 큰 고초를 겪었을 것이다. 디스크가 나를 살렸다고 나는 지금도 믿는다. 인생에는 공짜가 없다. 하나를 잃으면 다른 하나를 얻게 되고, 하나를 얻으면 다른 하나를 잃게 된다.

 

수술 후에는 좋아하던 테니스를 못 하게 되었지만 대신 수영을 배웠다. 의사가 수영을 권했는데 나에게는 운동이기보다 재활치료의 명분이 더 컸다. 그 덕분에 개구리헤엄에서 벗어나 자유영, 배영, 평영을 모두 배울 수 있었다. 접영은 허리를 심하게 쓰기 때문에 삼가라고 했다. 일상화로 운동화를 애용하게 된 것도 그때부터였다. 양복 정장을 입어도 구두 대신 운동화를 신었다. 그 습관은 지금껏 이어지고 있다.

 

디스크 수술을 할 때 서울대병원 2인실에 입원해 있었는데 옆 자리에 내 또래의 환자가 있었다. 그는 두 주일 가량 함께 있는 동안 한 마디도 나누지 못할 정도로 특이했다. 그는 하루 종일 침대에 모로 누워 꼼짝을 하지 않았고 입을 닫았다. 면회를 오는 사람도 어머니와 아내, 둘 외에는 없었다.

 

낮에는 그의 어머니가 저녁에는 아내가 따로 찾아와서 30분 정도 있다가 갔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는 절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말소리도 작고 조심스러웠다. 어머니가 찾아오면 그는 철저히 외면했다. 어머니는 무언가를 설득하고 한숨만 쉬다가 돌아갔다. 대신 아내가 오면 조곤조곤 나누는 다정한 대화가 들렸다.

 

내용을 자세히 알 수는 없었지만 대략적인 상황은 이랬다. 그는 독일 유학중에 아내를 만나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결혼했다. 아들이 디스크에 걸린 사실을 안 어머니는 강제로 귀국시켜 서울대병원에 입원시켰다. 한국에서 병을 고치고 아내와는 이혼하라는 것이었다. 어머니가 아무리 타일러도 그는 무대응이었다. 날 가만 내버려두라는 무언의 항의였을 것이다. 병실에서 본 모자는 완전히 불통이었다. 그는 어머니한테는 입을 닫았지만, 저녁에 찾아오는 아내한테는 다정했다.

 

어느 날 아내가 와서 퇴원 수속을 하고 그를 데려갔다. 병실을 나가면서 "병 잘 고치세요"라고 한 게 그가 나에게 건넨 유일한 한 마디였다. 뒤에 어머니가 와서 아들이 없어진 것을 보고는 너무나 황망해 했다. 그는 아내와 다시 독일로 돌아갔을까? 어머니는 왜 그렇게 아들에 집착했을까? 빈 침대를 보며 우리는 그의 행복한 앞날을 빌었다.

 

디스크가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병은 아니지만 30대 때 허리에 탈이 났다는 것은 나름 심각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어쩌겠는가. 앞으로 남은 인생은 조심해 살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수호천사가 있다면 디스크라는 충격요법을 쓰신 것이리라. 그때는 불운이라고 여겼지만 지금 돌아보면 나를 살리려는 숨은 뜻이 있었는지 모른다.

 

 

이 사진은 디스크 수술을 받기 전 해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1985년일 것이다. 봄의 어느 날 한껏 치장을 하고 개나리 앞에 섰다. 장소는 아파트 화단인 것 같다. 인생이 봄처럼 환한 웃음만 가득하다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때 찍은 사진을 보면 센터 포커스 필터를 자주 사용했다. 가운데 인물에 집중하기 위해 주변을 흐리게 하는 필터다. 자그마한 병아리 같던 아이들은 이제 40대가 되었다.

 

이 사진을 본 아내는 대뜸, 고운 나를 데려다가 일을 많이 시켜서 이렇게 만들었다고 눈을 흘긴다. 야속한 세월 탓을 해야 맞는 데 말이다. 결혼 초기의 이야기가 나오면 아내는 고개를 젓는다. 아내의 머릿속 저장창고에는 서운한 일들만 가득 담겨 있는 것 같다. 자극하지 않으려면 옛날 앨범은 들추지 않는 편이 현명하다. 그런데 늙으면 추억의 힘으로 산다는데 이를 어쩔까. 함께 공유할 즐거운 추억을 어디서 찾을지는 더 궁리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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