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주야, 이제 너 좋아하는 배구장 가서 공놀이도 실컷 하고, 바다로 산으로 가서 맑은 공기 시원하게 마셔. 다음 생애엔 언니랑 남들처럼 4500원짜리 커피 마시면서 산책도 하고, 길거리에서 떡볶이랑 튀김도 사 먹자. 남들처럼 손 잡고 여행도 떠나고, 너 좋아하는 노래방도 가자. 남들처럼, 남들처럼."
지난 3일 가습기 살균제 피해자였던 안은주씨가 사망했을 때 언니가 오열하며 한 말이다. 안은주씨는 2011년에 발병하여 12년간 투병하다가 결국 생을 마감했다. 배구 선수 출신이었던 안은주씨는 누구보다 건강했다고 한다. 안은주씨는 가습기 살균제에 의한 1774번째 사망자였다.
우리 사회를 뒤흔들었던 가습기 살균제 참사는 아직도 현재진행형이다. 일부 기업의 처벌이 이루어졌지만 다른 가해자들은 1심에서 무죄를 받고 지금은 2심이 진행 중인 것으로 알고 있다. 제대로 보상을 받지 못하는 피해자들은 폐만 아니라 여러 합병증에 시달리고 있다. 가습기 살균제가 시판된 것은 1994년이고 원인 불명의 폐 질환이 다년간 발생하여 공식적인 조사를 시작한 게 2011년이니 17년 동안 무방비로 노출된 셈이었다. 가습기 살균제는 특히 영유아와 산모에게 치명적으로 작용했다.
당시에 우리나라 사람 중 가습기에 노출 안 된 사람은 드물 것이다. 가습기가 세균이 번식할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으니 누구나 청결을 위해 살균제를 고려할 만했다. 가족의 건강을 우선한 것이 도리어 독이 된 것이다. 속으로 찜찜했을지라도 대기업에서 판매하고 정부가 허가한 제품이니 믿고 썼을 것이다. 책임이 누구에게 있는지는 명약관화하다.
날벼락을 맞은 피해자들을 생각하면 너무 가슴이 아프다. 졸지에 건강을 잃고 폐인이 되어 지내다가 죽음을 맞는다. 그렇다고 적절한 보상이 된 것도 아니다. 아직도 농성과 투쟁을 하지만 관련 기업에서는 피해자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고 있다. 정부도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는다. 이 사건의 규모나 의미에 비해 우리 사회가 너무 피해자의 고통을 외면하는 것 같다. 유럽 같은 선진국에서 이런 일이 벌어졌다면 그 뒷처리가 어땠을지 생각해 본다.
내 일이 아니라고 안도하기에는 이런 위험이 도처에 널려 있다. 만약 내 가족 중에 피해자가 있다면 심정이 어떠할까. 그저 무심한 방관자가 될 수 있을까. 현재의 나 역시 무지하기 때문에 악성 환경에 노출된지도 모른 채 희희낙락하고 있는지 모른다. 거의 드러난 사실을 가지고도 이렇게 고된 투쟁의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다른 숨겨진 것들이야 오죽 많을까. 진실을 밝히는 목소리는 거대 이익집단 앞에서 무력하다.
윤석열 대통령은 어퍼컷 세레머니를 즐겨한다. 대통령이 되고 나서도 심심치 않게 선보인다. 그 어퍼컷 주먹이 어디로 향해야 하는지 과연 제대로 보여줄 수 있을까. 기업 중심의 정책이 도리어 국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지는 않을지 우려한다. '남들처럼' 평범한 일상을 누리고 싶었던, 우리 사회의 억울한 희생자들 중 한 명인 고 안은주씨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