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 안도현

샌. 2004. 9. 6. 10:27


저 도시를 활보하는 인간들을 뽑아내고

거기에다 자작나무를 걸어가게 한다면

자작나무의 눈을 닮고

자작나무의 귀를 닮은

아이를 낳으리


봄이 오면 이마 위로

새 순 새록새록 돋고

가을이면 겨드랑이 아래로

가랑잎 우수수 지리


그런데 만약에

저 숲을 이룬 자작나무를 베어내고

거기에다 인간을 한 그루씩 옮겨 심는다면

지구가, 푸른 지구가 온통

공동묘지 되고 말겠지

 

- 자작나무의 입장을 옹호하는 노래 / 안도현


저 거리를 걸어가는 사람들 중에서 자작나무를 닮은 사람이 많아진다면 도시는 푸른 숲의 향기로 가득할 거야.

칙칙한 매연 대신에 신선한 산소가 거리를 감싸고 사람들은 이제 심호흡을 크게 할 거야.

잿빛 도시에 꽃이 피어나고, 예쁜 새들이 찾아와 노래할 거야.

사람들의 마음도 꽃처럼 환하게 피어나고,새들 따라서 즐거이 노래할 수 있겠지.

너를 누르고 내가 앞서야 한다는 사람들의 이기심도 바람 따라 날아가 버릴 거야.

그런데 자작나무를 닮은 사람들은 다 어디에 숨어있을까?

거리에는 온통 도시의 내성에 강해진 사람들이 칼날을 번득이며 걸어가고, 이젠 숲을 향해 선전포고를 하고 있네.

미래에 지구는 아마도 거대한 묘비명이 될지도 몰라.

자작나무를 닮은 사람들이 많아져서 지구의 푸른 꿈이 되살아났으면 좋겠어.

함께 살아가는 아름다운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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