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가정 / 박목월

샌. 2004. 11. 26. 15:35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내 신발은

십구문 반.

눈과 얼음의 길을 걸어,

그들 옆에 벗으면

육문 삼의 코가 납작한

귀염둥아 귀염둥아

우리 막내동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 반.


아랫목에 모인

아홉 마리의 강아지야

강아지 같은 것들아.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

내가 왔다.

아버지가 왔다.

아니, 십구문 반의 신발이 왔다.

아니, 지상에는

아버지라는 어설픈 것이

존재한다.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 가정 / 박목월

 

아버지가 그립다.

이젠 찾아볼 길 없는 아버지의 위엄과 권위가 그립다.

지금 아버지들은 너무나 작아져서 집안 어디에서도 찾아보기가 힘들다.

눈과 얼음의 길, 굴욕과 굶주림과 추운 길을 걸어온 우리들의 아버지는 어디에 있는가?

이 시는 십구문 반이라는 표현으로 인하여 더욱 따스하다.

십구문 반이 2백 몇십 밀리미터로 변하면서 아버지의 자리는 자꾸만 줄어들었는지도 모른다.

그 시대는 추웠지만 그래서 가족간의 유대는 더욱 각별해야만 했을 것이다.

오늘은 첫눈이 흩날리더니 세찬 바람이 몸을 움츠러들게 한다. 어떤 외풍에도 든든한 바람막이가 되어주는 아버지의 넓은 어깨가 더욱 그리워진다.

같은 시인의 '밥상 앞에서'라는 시이다.


나는 우리 신규가

젤 예뻐

아암 문규도 예쁘지.

밥 많이 먹는 애가

아버진 젤 예뻐.

낼은 아빠 돈 벌어가지고

이만큼 선물을

사갖고 오마.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비가 변한 눈 오는 공간.

무슨 짓으로 돈을 벌까.

그것은 내일에 걱정할 일.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그것은 아버지의 사랑의 하늘.

아빠, 참말이지.

접 때처럼 안 까먹지.

아암, 참말이지.

이만큼 선물을

사갖고 온다는데.

이만큼 벌린 팔에 한 아름

바람이 설레는 빈 공간.


어린것을 내가 키우나.

하나님께서 키워 주시지

가난한 자에게 베푸시는

당신의 뜻을

내야 알지만

상 위에 찬은 순식물성.

숟갈은 한죽에 다 차는데

많이 먹는 애가 젤 예뻐

언제부터 측은한 정으로

인간은 얽매어 살아왔던가.

이만큼 낼은 선물 사올께.

이만큼 벌린 팔을 들고

신이여. 당신 앞에

육신을 벗는 날,

내가 서리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소리들 / 나희덕  (0) 2004.12.09
가면 / 홍윤숙  (1) 2004.12.02
내가 보고 싶은 것들 / 박노해  (3) 2004.11.21
나무들 / 칼머  (1) 2004.11.11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  (4) 2004.11.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