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내가 보고 싶은 것들 / 박노해

샌. 2004. 11. 21. 14:08

9시 뉴스를 진행하는 장애우 앵커를 보고 싶어요

노동하는 삶의 철학을 강의하는 노동자 교수님을 보고 싶어요

이혼한 젊은 여자가 실력 있는 대통령으로 뽑히는 걸 보고 싶어요

동남아시아계 서울 시장이 세계경영을 이끄는 걸 보고 싶어요


서울역에서 상경하는 농사꾼에게 정중히 경례하는 경찰들이 보고 싶어요

안기부 청사에 아이들과 김밥 싸들고 격려 방문하는 시민들을 보고 싶어요

북한 노동자의 손에 깨끗이 쓰러진 수령의 동상을,

항일 운동하던 시절의 김일성 장군 사진이

독립기념관에 걸려진 걸 보고 싶어요


거리에 자동차보다 많은 자전거의 물결을 보고 싶어요

안 갖는 긍지로 적게 벌고 나누어 쓰자며 '푸른 생산'을 내건

파업 노동자들을 만나고 싶어요


토실토실 살 오른 아프리카 아이들이

두 뺨 발그레한 남북한 아이들과 어우러져

맑은 한강에서, 낙동강에서 발가벗고 물장구치는

여름 캠프를 보고 싶어요


초파일에 연등을 켜 단 교회에,

성탄절에 트리를 세운 산사에 가보고 싶어요

존경받는 레즈비언 국회의원과 악수를 나누고 싶고

흑인 여성 교황을 만나보고 싶어요

먼 행성에서 온 외계 생명과 우주영성시대를 함께 토론하고 싶어요


무엇보다도 나이 들수록 화를 적게 내고 욕심이 줄어들어

안으로 다숩게 잘 익어가는 내 모습,

돈 버는 능력보다 사랑하는 능력이 부쩍 커져서

갈수록 새로워지고 깊어지는 내 모습이 보고 싶어요


- 내가 보고 싶은 것들 / 박노해

 

 

내가 보고 싶은 세상은 남보다 내가 먼저 변할 때 찾아온다.

비록 처음에는 작은 물방울에 불과하지만 그런 물방울들이 모이고 모인다면 언젠가는 큰 강을 이룰 것이다.

그래서 작은 물방울들이 소중하다.

착하고 성실한 사람들이 존경받는 세상, 나보다 남을 먼저 배려할 줄 아는 성숙한 세상, 모든 사람들이 차별받지 않고 서로 서로 도우며 살아가는 세상, 사랑이 가득하고 웃음이 넘쳐나는 세상.....

비록 느리기는 하지만역사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믿고 싶다.

지금 여기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먼저 나부터 그런 꿈을 닮아가는 것이다.

 

'나이 들수록 화를 적게 내고 욕심이 줄어들어

안으로 다숩게 잘 익어가는 내 모습

돈 버는 능력보다 사랑하는 능력이 부쩍 커져서

갈수록 새로워지고 깊어지는 내 모습이 보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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