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가을날 / 허영자

샌. 2004. 10. 29. 13:40

세상엔 가을이

우리한텐 이별이 왔다

안녕히

늘 안녕히


우리는 가난한 연인이나

가진 것 모두 서로 주었기

빈 알몸으로

후회는 없다


꽃이나 나무나

온갖 식물이 그러하듯

나도

빛나는 사랑의 열매 하나 달고

이 愁心 깊은 계절을 견디리라


정녕

아무도 우리를

갈라놓을 수 없던 열정의 시간

보랏빛 추억의 때를

저 높다란

구름 선반 위에 갈무리 하느니


더욱 넉넉히 허용될

아름다운 날을 위하여

낙엽 쌓인 조롱길이 열린다

가앙 가앙 푸르른

가을 하늘 열린다

 

- 가을날 / 허영자

 

올해는 유난히 파란 가을 하늘이 가슴 시리도록 아름답다.

되돌아보니 봄에는 황사도 덜 했고, 여름 태풍도 비켜갔고, 비 피해도 적었고, 다른 해보다 자연 혜택을 많이 받은 해인 것 같아 고맙다.

상대적인지 이웃 일본은 태풍과 지진의 자연 재해로 일 년 내내 시달리는 것 같다. 이런 걸 보면 그저 마냥 좋아할 일도 아니다.

그래도 역시 가을은 파란 하늘이 있어 가을이다.

가을 하늘을 바라볼 때면 이 시의 마지막 부분에 나오는 '가앙 가앙'이라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왜 이 말이 그렇게 인상적으로 다가오는지 이유를 찾아보다가 문득 어릴 때 보았던 만화가 생각났다. 그 만화에는 하늘에 비행기가 나타나는 소리를 이렇게 묘사했다. 적군에 포위된 아군을 구하러 멀리서 날아오는 반가운 비행기 소리가 '가앙-'이었다.

옛날에 읽었던 만화를 연상한 것이 엉뚱하긴 하지만 '가앙'이라는 말에서는 뭔가 기쁜 희망의 메시지로 나에게는 들린다.

그래서 파란 가을 하늘을 바라보면 넓은 하늘 어디선가 '가앙-' 하고 나지막한 소리가 들리면서 사랑과 행복의 천사가 내려오는 것 같은 착각에 빠진다.

가을은 함께 했던 많은 것과의 이별의 계절이지만 그 헤어짐은 더욱 아름다운 날을 위한 길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세상은 아무리 혼돈스럽고 힘들어도 가을 하늘은 저기 저렇게 가앙 가앙 열려 있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무들 / 칼머  (1) 2004.11.11
단순하게 느리게 고요히 / 장석주  (4) 2004.11.06
귀천 / 천상병  (4) 2004.10.19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1) 2004.10.12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3) 2004.10.0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