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샌. 2004. 10. 12. 14:15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아름다운 얼굴

아름다운 눈

아름다운 목

아름다운 손목


서로 다하지 못하고 시간이 되려니

인생이 그러하거니와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실로 스스로의 쓸쓸한 투쟁이었으며

스스로의 쓸쓸한 노래였으니


작별하는 절차를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방법을 배우며 사세

작별을 하는 말을 배우며 사세


아름다운 자연

아름다운 인생

아름다운 정

아름다운 말


두고 가는 걸 배우며 사세

떠나는 연습을 하며 사세


인생은 인간들의 옛 집

아, 우리 서로 마지막

말을 배우며 사세

 

- 헤어지는 연습을 하며 / 조병화

 

어느덧 거리에는 가로수의 낙엽이쌓이고 있다.

지금 바라보는 창 밖으로 또 하나 빠알간 담쟁이 잎 하나가 아래로 떨어진다.

때가 되어서 어머니 품을 떠나는 가을 잎의 낙하가 가볍다. '안녕!' 하며 바람에 몸을 내맡기고 또 다른 세계로의 여행을 떠나는 것 같다.

세상에 나와서 만나고 사랑하고 관계를 맺는 것도 중요하지만, 떠나고 버리고 사라지는 것 또한 중요함을 이 계절은 보여준다.

'세상에 와서 알아야 할 일은 '떠나는 일'일세'

익숙한 것들과 결별함으로써 우리는 새로운 세계를 만날 수 있다. 새로운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게 된다는 뜻이다.

떠남은 고통이지만 그것 없이는 인간의 성숙도 없다. 영혼은 포기의 눈물을 먹고 자란다. 이것이 우리 삶의 신비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온 것은 이 세상과 헤어지기 위해서인지도 모른다. 잘 산다는 것은 잘 헤어진다는 것과 같은 말일 수도 있다.

열심히 살지만 집착이 없는 삶, 많이 사랑하지만 애착에 매이지 않는 삶을 살라고 저렇게 가을 하늘은 맑으며 텅 비어있는지 모른다.

때가 되면 누구에게나 이 세상과의 이별의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낯익고 정든 것과의 이별은 여전히 아쉽고 쓸쓸하고 허전하겠지만 그날이 왔을 때 이 세상에서 맺었던 인연들과 따스한 미소를 나누며 가볍게 안녕을 하고 싶다.

마지막을 화사한 색깔로 단장하고 미련 없이 대지의 품으로 돌아가는 저 낙엽처럼......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날 / 허영자  (2) 2004.10.29
귀천 / 천상병  (4) 2004.10.19
희미한 옛 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3) 2004.10.06
특급열차를 타고 가다가 / 신경림  (1) 2004.09.30
당나귀가 나는 좋아 / 프란시스 잠  (0) 2004.09.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