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48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쳐다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

시읽는기쁨 2006.08.29

부석사 무량수 / 정일근

어디 한량없는 목숨 있나요 저는 그런 것 바라지 않아요 이승에서의 잠시 잠깐도 좋은 거예요 사라지니 아름다운 거예요 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요 사시사철 피어 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 사람도 사라지니 아름다운 게지요 무량수를 산다면 이 사랑도 지겨운 일이어요 무량수전의 눈으로 본다면 사람의 평생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우리도 무량수전 앞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반짝하다 지는 초저녁별이어요 그래서 사람이 아름다운 게지요 사라지는 것들의 사랑이니 사람의 사랑 더욱 아름다운 게지요 - 부석사 무량수 / 정일근 해가 지지 않는다면 밝음의 의미를 모를 것이다. 꽃이 시들지 않는다면 그 꽃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지 못할 것이다. 모든 존재는 유한하고 끝이 있어서 애틋..

시읽는기쁨 2006.08.24

산다는 것 / 배현순

산다는 것이 무언지 아세요 새처럼 가벼워지는 일 나무처럼 뿌리를 깊이 내리는 일 바다처럼 깊고 푸르르는 일 바람처럼 춤추는 일 꽃잎처럼 감싸안는 일 들풀처럼 다시 일어나는 일 햇살처럼 반짝이는 일이지요 때론 비처럼 울어도 볼 일 가랑비에 젖어도 볼 일 안개에 묻혀 숨어도 볼 일 이슬처럼 또르르 굴러도 볼 일이지요 벼랑끝에 핀 선홍빛 진달래 아스라이 피었다 지는 일 열두 폭 치맛자락에 엎어져 울다 울다 지쳐 꿈꾸어 보는 일이지요 - 산다는 것 / 배현순 산다는 게 뭔지 나는 몰라요. 뭔가 보물이 들어있는 것 같기도 하고, 실없는 농담 같기도 하고 이루어야 할 그 무엇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다 헛일 같기도 하고 경쾌한 행진곡 같기도 하고, 음울한 장송곡 같기도 하고 짖궂게 짜여진 각본 같기도 하고, 우연..

시읽는기쁨 2006.08.23

이런 고요 / 유재영

하늘길 먼 여행에서 돌아온 구름 가족이 희고 부드러운 목덜미를 잠시 수면에 담그고 있는 동안 이곳에서 생애의 첫여름을 보낸 호기심 많은 갈겨니 새끼들이 물 밖으로 튀어 올랐다가 다시 수초 사이로 재빨리 사라진다 일순, 움찔했던 저수지가 다시 조용해졌다 - 이런 고요 / 유재영 도시로 돌아오니 문명의 소음이 제일 먼저 반긴다. 끊임없이 들려오는 자동차 소리 때문에 잠이 들지 않는다. 여름밤이건만 풀벌레 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는다. 아니 들을 수가 없다. 불쌍한 도시인들은 고요를 빼앗겼다. 이런 데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적당히길들여지는 길밖에는 없다. 문득 바쇼의 하이쿠가 떠오른다. '오래된 연못 개구리 뛰어드는 소리'

시읽는기쁨 2006.08.19

민달팽이 / 김신용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띈,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納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

시읽는기쁨 2006.08.13

비에도 지지 않고 / 미야자와 겐지

비에도 지지 않고 바람에도 지지 않고 눈에도, 여름의 더위에도 지지 않는 튼튼한 몸을 갖고 욕심은 없이 결코 화내지 않으며 언제나 조용히 웃는다 하루에 현미 네 홉과 된장국과 약간의 야채를 먹고 모든 일에 타산적으로 행동하지 않고 잘 보고 들어 행하고 이해하며 그리고 잊지 않고 들판의 숲 그늘 작은 초가에 살며 동쪽에 병든 아이 있으면 가서 간호해 주고 서쪽에 지친 어머니 있으면 가서 그 볏단을 져 주고 남쪽에 죽어 가는 사람 있으면 가서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말해주고 북쪽에 싸움이나 소송 있으면 부질없는 일이니 그만 두라 하고 가뭄이 들었을 때는 눈물을 흘리고 냉해의 여름에는 벌벌 떨며 걷고 모두에게 멍청이라 불리고 칭찬 받지도 않고 걱정시키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나는 되고 싶다 - 비에도 지지 않고..

시읽는기쁨 2006.08.11

學道 / 李珥

學道卽無著 隨緣到處遊 暫辭靑鶴洞 來玩白鷗州 身世雲千里 乾坤海一頭 草堂聊寄宿 梅月是風流 - 學道 / 李珥 도를 배움은 곧 집착 없으매라 인연 따라 이른 곳에서 노닐 뿐이네 잠시 청학동을 하직하고 백구주에 와서 구경하노라 내 신세는 천리 구름 속에 있고 천지는 바다 한 모퉁이에 있네 초당에 하룻밤 묵어가는데 매화에 비친 달 이것이 풍류로다 유학자였지만 유가의 경계를 넘어선 인물 - 율곡 이이. 율곡은 당시에는 이단에 가까웠던 노장사상을 연구하고 도덕경을 주석했으며 불교에도 관심이 많았고, 해동공자라는 칭호를 받을 정도로 유학의 대가였지만 유, 불, 선이라는 벽에 걸림이 없이 도(道)를 따라 산 자유인이었다. 도의 세계는 종교의 구분이나 사상의 벽을 넘어서 있다. 이 시를 보면 율곡은 도의 비밀을 살짝 열어 ..

시읽는기쁨 2006.08.10

듣기 / 연인선

마른 강아지풀도 말을 한다 노란 아카시아도 말을 한다 도시를 메운 문명의 소리에 길든 사람들 고요를 못 견뎌 통하지도 않는 말에 매달려 하루, 한달, 일년, 생을 난다 그 사이 사방 귀머거리 된 살기 바쁜 사람들 옆에서 씨앗 피며 봉오리 터지며 나무 크며 단풍 타며 낙엽 털며 자연이 소리없이 말을 한다 누가 듣지 않아도 좋은 자기만의 말을 생명의 말을 한다 그 말 듣기 얼마나 복된가 - 듣기 / 연인선 무슨 영화였던가, 해 뜨는 소리를 듣기 위해 천사들이 바닷가로 모이는 장면이있었다.우리가 소리를 듣지 못하는 것은 소리가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 청각의 한계거나, 아니면 들을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 또한 마찬가지다. 불행하게도 현대인은 문명의 소리에 귀 멀어 자연의 소리에는 귀머거리가 되어가고 ..

시읽는기쁨 2006.08.07

어디에다 고개를 숙일까 / 김용택

어디에다가 고개를 숙일까 아침 이슬을 털며 논길을 걸어오는 농부에게 언 땅을 뚫고 돋아나는 쇠뜨기풀에게 얼음 속에 박힌 지구의 눈 같은 개구리 알에게 길어나는 올챙이 다리에게 날마다 그 자리로 넘어가는 해와 뜨는 달과 별에게 그리고 캄캄한 밤에게 저절로 익어 툭 떨어지는 살구에게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둥그렇게 앉아 노는 동네 아이들에게 풀밭에 가만히 앉아 되새김하는 소에게 고기들이 왔다갔다하는 강물에게 호미를 쥔 우리 어머니의 흙 묻은 손에게 그 손 엄지손가락 둘째 마디 낮에 나온 반달 같은 흉터에게 날아가는 호랑나비와 흰나비와 제비와 딱새에게 저무는 날 홀로 술 마시고 취한 시인에게 눈을 끝까지 짊어지고 서 있는 등 굽은 낙락장송에게 날개 다친 새와 새 입에 물린 파란 벌레에게 비 오는 가을 저녁 오래..

시읽는기쁨 2006.08.01

Leisure / W. H. Davies

What is this life if, full of care, We have no time to stand and stare No time to stand beneath the boughs And stare as long as sheeps or cows No time to see, when woods we pass, Where squirrels hide their nuts in grass. No time to see, in broad daylight, Streams full of stars, Like skies at night. - Leisure / W. H. Davies 무슨 인생이 그럴까, 근심에 찌들어 가던 길 멈춰 서 바라볼 시간 없다면 양이나 젖소들처럼 나무 아래 서서 쉬엄쉬엄 바라볼 틈 없다..

시읽는기쁨 2006.07.31

똥파리와 인간 / 김남주

똥파리는 똥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떼지어 붕붕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시궁창이건 오물을 뒤집어쓴 두엄더미건 상관 않고 인간은 돈이 많이 쌓인 곳에 가서 무리지어 웅성거리며 산다 그곳이 어디건 범죄의 소굴이건 아비규환의 생지옥이건 상관 않고 보라고 똥 없이 맑고 깨끗한 데에 가서 이를테면 산골짜기 옹달샘 같은 데라도 가서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떼지어 사는 똥파리를 보라고 돈 없이 가난하고 한적한 데에 가서 이를테면 두메산골 외딴 마을 깊은 데라도 가서 아무도 보지 못할 것이다 무리지어 사는 인간을 산 좋고 물 좋아 살기 좋은 내 고향이란 옛말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똥파리에게나 인간에게나 똥파리에게라면 그런 곳은 잠시 쉬었다가 물찌똥이나 한번 씨익 깔기고 돌아서는 곳이고 인간에게라면 그런 곳은 주말이나..

시읽는기쁨 2006.07.27

앵화 / 무산

어린 날 내 이름은 개똥밭의 개살구나무 벌 나비 질탕한 봄도 꽃인 줄 모르다가 담 넘어 순이 가던 날 피 붉은 줄 알았네 - 앵화 / 무산 '櫻(앵)'은 앵두나무 앵 자이다.동시에 벚나무를 나타내기도 한다. 그래서 '앵화(櫻花)'란 앵두꽃이나 벚꽃을 이르는 말이다. 무산 스님은 현재 백담사 회주(會主)로 계시는 시조 작가이시다. 이 시조가 공감을 얻는 것은 우리들 모두의 보편적인 경험을 얘기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누구의 마음 속에든 그런 순이의 존재가 있을 것이다. 또한 이 시조는 인간의 정신적 성숙에대해서도 말해 주고 있다. 그것은 '상실 - 고통 - 눈뜸'이라는 전형적인 과정이다. 어린 날도 역시 하나의 삶이다. 그러나 깨우침의 관점에서 그 시절은 우물 안 개구리일 뿐이다. 손바닥 만한 하늘을 전 우..

시읽는기쁨 2006.07.21

사랑법 / 강은교

떠나고 싶은 자 떠나게 하고 잠들고 싶은 자 잠들게 하고 그리고도 남은 시간은 침묵할 것 또는 꽃에 대하여 또는 하늘에 대하여 또는 무덤에 대하여 서둘지 말 것 침묵할 것 그대 살 속의 오래 전에 굳은 날개와 흐르지 않는 강물과 누워 있는 누워 있는 구름 결코 잠깨지 않는 별을 쉽게 꿈꾸지 말고 쉽게 흐르지 말고 쉽게 꽃피지 말고 그러므로 실눈으로 볼 것 떠나고 싶은 자 홀로 떠나는 모습을 잠들고 싶은 자 홀로 잠드는 모습을 가장 큰 하늘은 언제나 그대 등 뒤에 있다 - 사랑법 / 강은교 이 시의 깊고 고요한 울림처럼 살고 싶다. 분주하지 말고, 안달하지 말고, 부산떨지 말고, 그리고 무엇에도 매달리지 말고..... 내 안의 굳은 날개, 말라버린 강물, 잠든 별들을 그대로 있으라 놓아두고..... 서둘지..

시읽는기쁨 2006.07.15

인생 / 이선영

내 인생이 남들과 같지 않다고 생각됐던 때의, 외딴길로 밀려나 있다는 낭패감 그러나 내 인생도 남들과 다르지 않다는 안도감을 느끼게 되었을 때 이윽고 그 남다르지 않은 인생들이 남다르지 않게 어우러져 가는 큰길에 줄지어 서서 이 늘비함을 따라 가야 할 뿐 슬며시 도망 나갈 외딴길이 없다는 낭패감 - 인생 / 이선영 인생은 난해하고 복잡하다. 홀로 있어도, 함께 있어도 우리는 늘 갈증을 느낀다. 외딴길로 밀려나 있다는 낭패감에 큰길로 들어서면, 이제는 도망 나갈 외딴길을 찾지 못해 다시 낭패감에 빠진다. 그러다가 언젠가는 제대로 된 길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니다. 죽을 때까지 그렇게 헤매기만 하다가 이 생을 마칠 것 같다. 그런 과정이 인생인가 보다. 인생이란 본래 그런 것인가 보다.

시읽는기쁨 2006.07.11

뒤편 / 천양희

성당의 종소리 끝없이 울려퍼진다 저 소리 뒤편에는 무수한 기도문이 박혀 있을 것이다 백화점 마네킹 앞모습이 화려하다 저 모습 뒤편에는 무수한 시침이 꽂혀 있을 것이다 뒤편이 없다면 생의 곡선도 없을 것이다 - 뒤편 / 천양희 나이가 든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있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도리어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이 더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일이다. 그리고 화려함 뒤에 숨어있는 아픔을 읽을 줄 아는 것이다. 행복한 웃음 뒤에 있는 쓸쓸함과 외로움을 보는 일이다. 남루한 행색의 나그네에게도 나름대로의 기쁨과 감사가 있음을 이해하는 일이다. 아름다운 종소리 울려퍼지는 성당 안에서는 지금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고 있음을 안타까워하는 일이다.

시읽는기쁨 2006.07.04

강가에서 / 김수영

저이는 나보다 여유가 있다 저이는 나보다도 가난하게 보이는데 저이는 우리집을 찾아와서 산보를 청한다 강가에 가서 돌아갈 차비만 남겨놓고 술을 사준다 아니 돌아갈 차비까지 다 마셨나보다 식구가 나보다도 일곱 식구나 더 많다는데 일요일이면 빼지 않고 강으로 투망을 하러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반드시 4킬로 가량을 걷는다고 한다 죽은 고기처럼 혈색없는 나를 보고 얼마전에는 애 업은 여자하고 오입을 했다고 했다 초저녁에 두번 새벽에 한번 그러니 아직 늙지 않지 않았느냐고 한다 그래도 추탕을 먹으면서 나보다도 더 땀을 흘리더라만 신문지로 얼굴을 씻으면서 나보고도 산보를 하라고 자꾸 권한다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는데 남방셔츠 밑에는 바지에 혁대도 매지 않았는데 그는 나보다도 가난해 보이고 그는 나보다도 짐이 무거..

시읽는기쁨 2006.06.27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인생은 고단하고 슬프다. 겉으로는 웃음으로 가리고 있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모두 외롭고 아픈 존재들이다.속을 감추려 우리는 양파처럼 수많은 껍질로 내면을 감싸고 있는지 모른다. 인생..

시읽는기쁨 2006.06.21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 이기철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입던 옷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도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해지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시읽는기쁨 2006.06.15

驟雨 / 良寬

오늘 구걸하다 소나기를 만나 잠시 낡은 사당으로 비를 피하네 우습구나, 바랑 하나와 바리때 하나 생애 맑고 깨끗한 무너진 집의 바람 今日乞食逢驟雨 暫時廻避古祠中 可笑一囊與一鉢 生涯潚灑破家風 - 驟雨 / 良寬 료칸[良寬, 1758-1831]은 무욕의 화신, 거지 성자로 불리는 일본의 선승이다. "다섯 줌의 식량만 있으면 그것으로 족하다" 라는 말이 뜻하듯 인간이 보여줄 수 있는 무욕과 무소유의 최고 경지를몸으로 실천하며 살았다. 료칸은 떠돌이 걸식 생활을 하면서도 시를 써가며 내면의 행복을 유지했다. 말 그대로의 청빈을 실천하며 산 사람이다. 단편적으로 듣게 되는 료칸의 일화는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다시금 깨닫게 해 준다. 료칸의 생애를 통해 대현[大賢]은 곧 대우[大愚]와 통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세..

시읽는기쁨 2006.06.07

오리 한 줄 / 신현정

저수지 보러 간다 오리들이 줄을 지어 간다 저 줄에 말단이라도 좋은 것이다 꽁무니에 바짝 붙어 가고 싶은 것이다 한 줄이 된다 누군가 망가뜨릴 수 없는 한 줄이 된다 싱그러운 한 줄이 된다 그저 뒤따라 가면 된다 뛰뚱뛰뚱하면서 엉덩이를 흔들면서 급기야는 꽥꽥대고 싶은 것이다 오리 한 줄 일제히 꽥꽥꽥 오리 한 줄 / 신현정 인간의 줄을 벗어나 차라리 저 뛰뚱거리며 걸어가는 오리들 꽁무니에 서고 싶다. 이념도, 욕망도, 무엇이 되고 싶은 소망도 벗어던지고 차라리 아무 것도 모르는 오리가 되어 저 뒷줄에 서서 따라가고 싶다. 5/31 지방선거가 끝났다. 사람들은 이 줄 저 줄에 갈라서 섰다. 어떤 사람은 억울해 하고, 어떤 사람들은 고소해 한다. 그러나 사람들의 떠드는 소리, 고함 소리는 이제 질린다. 차라..

시읽는기쁨 2006.06.01

길의 노래 / 이기철

내 마지막으로 들 집이 비옷나무 우거진 기슭이 아니면 또 어디겠는가 연지새 짝지어 하늘 날다가 깃털 하나 떨어뜨린 곳 어욱새 속새 덮인 흙산 아니고 또 어디겠는가 마음은 늘 욕심 많은 몸을 꾸짖어도 몸은 제 길들여온 욕심 한 가닥도 놓지 않고 붙든다 도시 사람들 두릅나무 베어내고 그곳에 채색된 丹靑 올려서 다람쥐 들쥐들 제 짧은 잠, 추운 꿈 꿀 穴居마저 줄어든다 먼 곳으로 갈수록 햇빛도 더 멀리 따라와 내 여린 어깨를 토닥이는 걸 보면 내 어제 분필과 칠판 앞에서만 열렬했던 말들이 가시 되어 일어선다 산골 처녀야, 눈 시린 十字繡 그만두고 여치 메뚜기 날개 접은 들판 콩밭 누렁잎 보아라 길 끝에 무지가 차라리 편안인 산들이 누워 있고 산 끝에 예지도 거추장스러운 피라미들에게 맡겨버린 물이 마음 풀고 흐..

시읽는기쁨 2006.05.24

나도 그리울 때가 있다 / 정미숙

살다 보면 그런 날 있지 않은가 문득 떠나고 싶고 문득 만나고 싶은 가슴에 피어오르는 사연 하나 숨 죽여 누르며 태연한 척 그렇게 침묵하던 날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고독이 밀려와 사람의 향기가 몹시 그리운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차 한 잔 나누며 외로운 가슴을 채워 줄 향기 가득한 사람들을 만나고 싶은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바람이 대지를 흔들어 깨우고 나뭇가지에 살포시 입맞춤하는 그 계절에 몹시도 그리운 그 사람을 만나고 싶은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살다 보면 가끔은 그런 날이 있지 않은가 - 나도 그리울 때가 있다 / 정미숙 사람들에 둘러싸여 있지만 사람이 그리울 때가 있다. 가끔씩 찾아오는 이 공허함과 허기짐, 사람으로 인하여 채워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만 사람이 고플 때가 있다. 고운 사람의 향..

시읽는기쁨 2006.05.19

듯 / 백무산

잊은 듯 깜박 잊은 듯 이슬방울이 서로 만난 듯 불을 이고 폭풍우 바다를 이고 사뿐한 듯 눈 한번 감은 듯이 천년 흐른 듯 나인 듯 너인 듯 - 듯 / 백무산 '듯'이라는 말이 이렇듯 아름다운 줄 이제야 알았다. '듯'은 분별과 단정의말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함이 아니라, 이것과 저것을 모두 포용하는 긍정과 상생의 세계를 나타내는 말이라 할 수 있다. 물과 불, 순간과 영원, 나와 너가 '듯'이라는 한 마디에 다 녹아 있다. 이 시에는 '반가사유상'이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시읽는기쁨 2006.05.13

오늘의 노래 / 이희중

심야에 일차선을 달리지 않겠습니다 남은 날들을 믿지 않겠습니다 이제부터 할 일은, 이라고 말하지 않겠습니다 건강한 내일을 위한다는 핑계로는 담배와 술을 버리지 않겠습니다 헤어질 때는 항상 다시 보지 못할 경우에 대비하겠습니다 아무에게나 속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심야의 초대를 기다리지 않겠습니다 신도시에서는 술친구를 만들지 않겠습니다 여자의 몸을 사랑하고 싱싱한 욕망을 숭상하겠습니다 건강한 편견을 갖겠습니다 아니꼬운 놈들에게 개새끼, 라고 바로 지금 말하겠습니다 완전과 완성을 꿈꾸지 않겠습니다 그리하여 늙어가는 것을 마음 아파하지 않겠습니다 다만 오늘 살아 있음을 대견해하겠습니다 어둡고 차가운 곳에서 견디기를 더 연습하겠습니다 울지 않겠습니다 - 오늘의 노래 / 이희중 중요한 것은 지금 이곳에서의 나의 기쁨..

시읽는기쁨 2006.05.09

오월의 유혹 / 김종호

곡마단 트럼펫 소리에 탑은 더 높아만 가고 유유히 젖빛 구름이 흐르는 산봉우리 분수인 양 쳐오르는 가슴을 네게 맡기고, 사양(斜陽)에 서면 풍겨오는 것 아기자기한 라일락 향기 계절이 부푸는 이 교차점에서 청춘은 함초롬히 젖어나고 넌 이브인가 푸른 유혹이 길들여 감미롭게 핀 황홀한 오월 - 오월의 유혹 / 김종호 60 년대 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 이 시가 실려 있었다. 내 기억이 맞다면 아마 고등학교 2 학년 교과서였을 것이다. 그때 나는 국어 시간을 제일 좋아했다. 교과서에는 지금 보아도 명문에 해당되는 좋은 글들이 여럿 실려 있었는데 그 글을 낭랑한 목소리로 해설해 주시는 국어 선생님 때문이었다. 선생님은 키가 자그만하시고 나이가 드셨지만 동안이셨다. 목소리가 무척 맑고 고왔던 기억이 난다. 국어 ..

시읽는기쁨 2006.05.01

독거(獨居) / 이원규

남들 출근할 때 섬진강 청둥오리 떼와 더불어 물수제비를 날린다 남들 머리 싸매고 일할 때 낮잠을 자다 지겨우면 선유동 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 미안하지만 남들 바삐 출장 갈 때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하고 정말이지 미안하지만 남들 야근 할 때 대나무 평상 모기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작설차를 마시고 남들 일중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일 없이 심심한 시를 쓴다 그래도 굳이 할 일이 있다면 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것일 뿐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내게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곧 죄일 때 그저 노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가 스스로 위로하고 치하하며 섬진강 산 그림자 위로 다시 물수제비를 날린다 이미 젖은 돌은 더 이상 젖지 않는다 - 독거(獨居) / 이원규 나는 자본이 돌리..

시읽는기쁨 2006.04.25

하여간 / 장철문

술자리에서 들은 얘기라 어떨진 모르겠는데, 하여간 청어(靑魚)라는 물고기가 있다는데, 하여간 그게 횟감으로는 참 끝내준다는데, 하여간 그놈 성질이 하도 급한 나머지 배 위로 올라오자마자 목숨을 탁 놓아버리는 바람에 그 착 감기는 살맛 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인데, 하여간 어느 코쟁이 나라의 좀 똘망똘망한 어부가 어찌하면 이걸 산 채로 도시에 가져가서 팔아먹을 수 있을까 밤낮으로 짱돌을 굴리다가 아하, 그렇지! 그럴싸한 수를 한가지 냈다는 것인데, 하여간 큼지막한 어항을 하나 만들어설라무네 거기 바다메기를 두어 마리 풀어놓고는 청어란 놈을 잡아 올리는 족족 어항에 집어넣어서는 득달같이 도시로 내달았다는 것인데, 하여간 청어란 놈은 바다메기한테 잡아먹힐까봐 어항 속에서 뺑뺑이를 도느라고 미처 죽을 새가..

시읽는기쁨 2006.04.14

정선 가는 길 / 박세현

1 걸어서 가보아야 할 땅 죽기 전에 가보아야 할 지명 신작로를 따라 터벅대며 가보아야 할 국토 작은 절망 큰 절망 풀뿌리처럼 엉겨사는 곳 봄이 오면 잊었던 꽃들 되살아오고 사람들 비탈진 밭에 나가 씨앗을 뿌리는 나라 씨앗은 그들의 한 됫박 숨찬 꿈이다 강원도 정선 사람의 이름으로 가보아야 할 마을 도라지꽃 같은 땅 삭은 부처 토막 같은 땅 자 이제 떠나자 우리의 여행에 끝없는 새 길이 열리기를 2 청량리발 정선행 10시 30분 사람들은 떠난다 손을 흔들며 손을 접으며 고개를 들고 고개를 숙이고 서울을 나간다 사내는 그들 틈에 끼어 떠나면서 다시 돌아올 기약을 잊는다 가자, 떠나는 자가 남아있는 자들을 전송하리라 죽은 자가 산 자를 제사 지내리라 가자, 오늘은 저 멀리 더 멀리 멀리까지 달려가자 다시 돌..

시읽는기쁨 2006.04.07

꽃샘바람 속에서 / 박노해

꽃샘바람 속에서 우리 꽃처럼 웃자 땅속의 새싹도 웃고 갓나온 개구리도 웃고 빈 가지의 꽃눈도 웃는다 꽃샘바람에 떨면서도 매운 눈물 흘리면서도 우리 꽃처럼 웃자 봄이 와서 웃는 것이 아니라 웃기 때문에 봄이 오는 것이니 - 꽃샘바람 속에서 / 박노해 꽃샘바람을 따라 감기가 손님으로 찾아왔다. 특히 목이 아픈데 아무래도 최근의 술과 담배를 즐긴 탓인가 보다. 올봄은 봄을 시샘하는 바람도 세고, 기상 변덕도 심하다. 오늘도 기온의 일교차가 15도가 넘는다고 예보되어 있다. 몸이 적응하기에 무리가 된다. 살다보면 인생의 꽃샘바람도 여러 번 겪는다. 세상사란 좋은 일이 생길수록 그것을 시샘하는 바람이 사납게 몰아치는 법이다. 그래도 웃자! 꽃샘추위가 있음으로써 봄은 더욱 화사하게 빛난다. 행복하기 때문에 웃는 것..

시읽는기쁨 2006.03.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