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부석사 무량수 / 정일근

샌. 2006. 8. 24. 14:47

어디 한량없는 목숨 있나요

저는 그런 것 바라지 않아요

이승에서의 잠시 잠깐도 좋은 거예요

사라지니 아름다운 거예요

꽃도 피었다 지니 아름다운 것이지요

사시사철 피어 있는 꽃이라면

누가 눈길 한 번 주겠어요

사람도 사라지니 아름다운 게지요

무량수를 산다면

이 사랑도 지겨운 일이어요

무량수전의 눈으로 본다면

사람의 평생이란 눈 깜짝할 사이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우리도 무량수전 앞에 피었다 지는

꽃이어요, 반짝하다 지는 초저녁별이어요

그래서 사람이 아름다운 게지요

사라지는 것들의 사랑이니

사람의 사랑 더욱 아름다운 게지요

 

- 부석사 무량수 / 정일근

 

해가 지지 않는다면 밝음의 의미를 모를 것이다. 꽃이 시들지 않는다면 그 꽃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지 못할 것이다. 모든 존재는 유한하고 끝이 있어서 애틋하고 아름답다.사람의 사랑 또한 유한하기 때문에 아름답다. 이별을 앞둔 사랑일수록 더욱 애틋하고 각별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사라지는 것들에 애착을 갖고 더욱 그리워하는가 보다.

 

그러나 무량수(無量壽)의 눈으로 본다면 모든 것은 순간일 뿐이다. 존재의 바다에서 반짝이는 명멸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그 반짝임은 공간적으로는 전우주와 시간적으로는 영원과 연결되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無量壽殿)은 아미타여래를 모신 전각이다. 아미타여래는 끝없는 지혜와 무한한 생명을 지녔으므로 무량수불(無量壽佛)로도 불린다.

 

부석사에 가거든 무량수전 앞에서 이 시를 읊어 볼 일이다. 찰나의 존재인 인간이 영원을 그리며 사모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기적이고 아름다움인 것 같다. 짧고 긴 것이 무슨 관계 있으랴. 생멸하는 모든 존재는 애틋하고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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