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샌. 2006. 8. 29. 09:10

바다가 보이는 언덕 위에

우체국이 있다

나는 며칠 동안 그 마을에 머물면서

옛사랑이 살던 집을 두근거리며 쳐다보듯이

오래오래 우체국을 쳐다보았다

키 작은 측백나무 울타리에 둘러싸인 우체국은

문 앞에 붉은 우체통을 세워두고

하루 내내 흐린 눈을 비비거나 귓밥을 파기 일쑤였다

우체국이 한 마리 늙고 게으른 짐승처럼 보였으나

나는 곧 그 게으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내가 이곳에 오기 아주 오래 전부터

우체국은 아마

두 눈이 짓무르도록 수평선을 바라보았을 것이고

그리하여 귓속에 파도소리가 모래처럼 쌓였을 것이다

나는 세월에 대하여 말하지만 결코

세월을 큰 소리로 탓하지는 않으리라

한번은 엽서를 부치러 우체국에 갔다가

줄지어 소풍 가는 유치원 아이들을 만난 적이 있다

내 어린시절에 그랬던 것처럼

우체통이 빨갛게 달아오른 능금 같다고 생각하거나

편지를 받아 먹는 도깨비라고

생각하는 소년이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다가 소년의 코밑에 수염이 거뭇거뭇 돋을 때쯤이면

우체통에 대한 상상력은 끝나리라

부치지 못한 편지를

가슴속 주머니에 넣어두는 날도 있을 것이며

오지 않는 편지를 혼자 기다리는 날이 많아질 뿐

사랑은 열망의 반대쪽에 있는 그림자 같은 것

그런 생각을 하다 보면

삶이 때로 까닭도 없이 서러워진다

우체국에서 편지 한 장 써보지 않고

인생을 다 안다고 말하는 사람들을 또 길에서 만난다면

나는 편지봉투의 귀퉁이처럼 슬퍼질 것이다

바다가 문 닫을 시간이 되어 쓸쓸해지는 저물녘

퇴근을 서두르는 늙은 우체국장이 못마땅해할지라도

나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만년필로 잉크냄새 나는 편지를 쓰고 싶어진다

내가 나에게 보내는 긴 편지를 쓰는

소년이 되고 싶어진다

나는 이 세상에 살아남기 위해 사랑을 한 게 아니었다고

나는 사랑을 하기 위해 살았다고

그리하여 한 모금의 따뜻한 국물 같은 시를 그리워하였고

한 여자보다 한 여자와의 연애를 그리워하였고

그리고 맑고 차가운 술을 그리워하였다고

밤의 염전에서 소금 같은 별들이 쏟아지면

바닷가 우체국이 보이는 여관방 창문에서 나는

느리게 느리게 굴러가다가 머물러야 할 곳이 어디인가를 아는

우체부의 자전거를 생각하고

이 세상의 모든 길이

우체국을 향해 모였다가

다시 갈래갈래 흩어져 산골짜기로도 가는 것을 생각하고

길은 해변의 벼랑 끝에서 끊기는 게 아니라

훌쩍 먼 바다를 건너가기도 한다는 것을 생각한다

그리고 때로 외로울 때는

파도소리를 우표 속에 그려넣거나

수평선을 잡아당겼다가 놓았다가 하면서

나도 바닷가 우체국처럼 천천히 늙어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 바닷가 우체국 / 안도현

 

나이가 들수록 고향 쪽으로 자주 고개를 돌리듯, 복고적이고 낭만적인 것들에점점 더마음이 끌린다. 그것은 아마 정(情)이 그립기 때문일 것이다. 단순히 예전 경험에 대한 추억만이 아닌 그 속에 녹아 있던 인간의 정과 낭만과 여유가 그립기 때문이리라.

 

그런 복고풍의 대표적인 상징 중의 하나가 우체국과 편지다. 딸랑딸랑 자전거를 타고 찾아오는 우체부를 가슴 설레며 기다리던 시절은 갔다. 이제 우체부를 눈빠지게 기다리는 사람은 없다. 대신에 우편함에는 쓸데없는 광고물과 돈 내라는 고지서들로 가득하다. 그리고 고전적인 주소는 골뱅이로 표시되는 이메일 주소로 대치되었다. 키보드를 두드리고 엔터를 누르면 사연은 전자부호로 바뀌어 순식간에 상대방에 전달된다. 중간의 인간적인 과정들은 모두 생략되고 기계가 그 역할을 대신한다. 물론 편리함과 신속함 같은 긍정적인 면도 있으나 뭔가 소중한 것을 빼앗긴 것 같은 아쉬운 심정도 크다. 느림의 미학,

그리움, 기다림, 그리고 마음의 여유가 있었던 예전의 어수룩한 시대가 자꾸만 그리워지는 이유다.

 

편지지에 편지를 써서 부쳐본 것이 언제적이었던가? 벌써 10년도 더 지난 일 같다. 이젠 우체국에 찾아갈 일도 거의 없다. 우체국과 정거장은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만남과 이별 같은 사람 사이의 정이 농축되어 나타나는 곳이다. 그런 장소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분위기가 있어 거기에 있는 것만으로도 사람은 정서적 분위기에 젖는다. 결코 컴퓨터 모니터나 휴대폰

화면으로는 느낄 수 없는것이다.

 

첨단의 전자기기에 둘러싸여 살고 있지만, 그리고 앞으로도 어쩔 수 없이 그렇게 살아야겠지만 왠지 가끔은 고전적인 사치도 부려보고 싶다. 파도소리 들리는 바닷가 우체국에서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운 편지 한 장 써 보내고 싶다.

'시읽는기쁨' 카테고리의 다른 글

가을 부근 / 정일근  (1) 2006.09.04
나의 나 / 이시영  (0) 2006.09.02
부석사 무량수 / 정일근  (0) 2006.08.24
산다는 것 / 배현순  (0) 2006.08.23
이런 고요 / 유재영  (0) 2006.08.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