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가을 부근 / 정일근

샌. 2006. 9. 4. 13:56

여름내 열어놓은 뒤란 창문을 닫으려니

열린 창틀에 거미 한 마리 집을 지어 살고 있었습니다

거미에게는 옥수수가 익어가고 호박잎이 무성한

뒤뜰 곁이 명당이었나 봅니다

아직 한낮의 햇살에 더위가 묻어나는 요즘

다른 곳으로 이사하는 일이나, 새집을 마련하는 일도

사람이나 거미나 힘든 때라는 생각이 들어

거미를 쫓아내고 창문을 닫으려다 그냥 돌아서고 맙니다

가을 바람이 불어오면 여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이 깊어지듯

미물에게도 가을은 예감으로 찾아와

저도 맞는 거처를 찾아 돌아갈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 가을 부근 / 정일근

 

무더웠던 여름도 서서히 지나가고 있다. 그리고 이젠 아침 저녁으로 부는 바람이 선선하다. 시인과 마찬가지로 여름내 열어놓았던 뒤켠 보일러실의 창문을 나도 닫았다. 거기에 거미줄이 엉켜있는 걸 보았지만 무심코 그냥 닫아버렸다. 그래서 시인의 마음이 더욱 각별하게 느껴진다.

 

머리로 아는 것을 몸으로 실천하기는어렵다. 뭇 생명을 사랑하고 함께 어울려 살아가겠다고 하면서 집안으로 들어온 거미나 벌레를그냥 보아넘기지 못한다. 현관문 옆에는 항시 살충제가 대기하고 있다. 지난 번에는 집 주위에 뱀이 자주 나타나봤던 곳과 다님직한 길에다 농약을 뿌렸다. 그 때문인지 그 뒤로는 뱀이 보이지 않았다. 쫓아내고 나니 내 마음이 편치 못하다. 작년에 벌과는 같이 산 적은 있었다. 수돗가 옆 땅 속에 벌이 집을 지었는데 퇴치할 방법을 몰라 불편했지만 조심하며 그냥 같이 살았다. 겨울이 지나고 봄이 되니 벌은 자연스레 옮겨갔다. 해가 바뀌니 아마 다른 곳으로 이동한 것이리라. 생각의 관점만 바꾸면 야생벌과도 이웃하며 같이 살 수가 있다는 것을 배웠다. 그들을 해꼬지만 않으면 벌들이 먼저 사람을 공격하지는 않는다.

 

열린 창문에 집을 지은 거미를 생각해 창문을 닫지 못하고 기다려주는 시인의 마음이 아름답다. 그렇게 사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님을안다. 그러나 나는 그런 마음을 닮고 싶고,꼭 그렇게 살고 싶다. 만약 그렇지 못하다면 언젠가 이 세상을 뜰 때 나는 눈물을 흘리며 후회하게 될 것 같다. 많은 돈도, 높은 지위도 거기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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