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샌. 2006. 9. 10. 07:17

신새벽 뒷골목에

네 이름을 쓴다 민주주의여

내 머리는 너를 잊은 지 오래

내 발길은 너를 잊은 지 너무도 너무도 오래

오직 한 가닥 있어

타는 가슴 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민주주의여

 

아직 동 트지 않은 뒷골목의 어딘가

발자욱소리 호르락소리 문 두드리는 소리

외마디 길고 긴 누군가의 비명소리

신음소리 통곡소리 탄식소리 그 속에 내 가슴팍 속에

깊이깊이 새겨지는 네 이름 위에

네 이름의 외로운 눈부심 위에

살아오는 삶의 아픔

살아오는 저 푸르른 자유의 추억

되살아오는 끌려가던 벗들의 피묻은 얼굴

떨리는 손 떨리는 가슴

떨리는 치떨리는 노여움으로 나무판자에

백묵으로 서툰 솜씨로

쓴다

 

숨죽여 흐느끼며

네 이름을 남 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 타는 목마름으로 / 김지하

 

노무현 대통령이 당선된 날 가슴 설렜던 사람이 한둘이 아니었을 것이다. 자유와 민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하며 싸웠던 사람들이 정권을 잡았으니 변하게 될 세상에 대한 기대로 나도 밤잠을 설친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3년여의시간이흘러 정권 후반기에 들어서며 참여정부가 가르쳐 준 것은 사람에 대한 실망밖에 없는 것 같다. 권력지향적인 사람들이 입은 옷은 자신의 목표가 이루어지면 훌훌벗어 던질 수단에 불과하다. 그런 사람들이 아무리 민중과 민주를 내걸고 정권을 잡더라도 세상이 달라지는 것은 별로 없다. 물론 세상의 관성을 몇몇 사람의 힘으로 막아내기는 힘들다. 또한 그분들의 과거 운동까지 폄하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사람에 대한 실망, 특히 진보 운동권에 대한실망은 안타깝기만 하다. 그들에 기대를 걸었던 많은 사회적 약자들의 서글픈 마음을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제도권에 들어가 세상을 변혁시키겠다는 다짐은 대부분 보수적이고 강고한 제도권 속으로 흡수되어 버린다. 도리어 어떤 사람은 더 철저한 주구가 되기도 한다. 과거의 열정이 돼지우리 속 먹이다툼의 치열함으로 변하는 것이다.

 

사람이 가지고 있는이념이나 사상보다는 체질을 더 믿는다는 어느 분의 말은 정말 옳다. 그나마 사람에게 덜 실망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외침에 귀 기울이기 보다는 차라리 관상 공부를하는 게 나을지 모른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의 가면을 벗겨 주었다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참여정부의 가장 큰 공적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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