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은총에 눈을 뜨니 / 구상

샌. 2006. 9. 22. 09:05

 

이제사 비로소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이 뜬다

 

이제까지 시들하던 만물만상이

저마다 신령한 빛을 뿜고

그렇듯 안타까움과 슬픔이던

나는 죽고 그 덧없음이

모두가 영원의 한 모습일 뿐이다

 

이제야 하늘이 새와 꽃만을

먹이고 입히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공으로 기르고 살리심을

눈물로써 감사하노라

 

아침이면 해가 동쪽에서 뜨고

저녁이면 해가 서쪽으로 지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지만

 

출구가 없던 나의 의식 안에

무한한 시공이 열리며

모든 것이 새롭고

모든 것이 소중하고

모든 것이 아름답다

 

- 은총에 눈을 뜨니 / 구상

 

 

'종교'보다는 '종교성'이라는 말이 좋다. '축복'보다는 '은총'이라는 말이 좋다. 벽돌로 지은 사원보다는 내 마음 안 그분의 거소가 더 진실되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일까? 그것은 인생의 어느 한 순간에 찾아오는 눈을 뜨는 순간의 경험이 아닐까? 눈을 뜬 사람에게 열린 새 세상은 은총과 놀라움이다. 눈을 뜨고 나서야 전에는 장님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러므로 눈을 뜬다는 것은 새로운 탄생이다. 모든 인간은 영적으로 다시 한 번 태어나야 한다.

 

 

눈을 뜨더라도 해는 여전히 동쪽에서 뜨고, 때를 넘기면 배가 고프기는 매한가지다.도리어 하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많은 슬픔을 준다. 더 예민하게 고통을 느끼게 한다. 어떤 면에서 깨달음은 아픔이기도 하다.

 

 

그러나 지금은 깨어지거나 상처나는 것을 두려워하거나 피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하늘의 뜻 안에서 일어나는 은총임을 알기 때문이다. 산산조각 난 그대로가 아름답다. 지금 이대로가 훌륭하다. 그러니 만물만상 그 모든 것이 소중하지 않은 게 없고, 아름답지 않은 게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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