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민달팽이 / 김신용

샌. 2006. 8. 13. 15:24

냇가의 돌 위를

민달팽이가 기어간다

등에 짊어진 집도 없는 저것

보호색을 띈, 갑각의 패각 한 채 없는 저것

타액 같은, 미끌미끌한 분비물로 전신을 감싸고

알몸으로 느릿느릿 기어간다

햇살의 새끼손가락만 닿아도 말라 바스라질 것 같은

부드럽고 연한 피부, 무방비로 열어놓고

산책이라도 즐기고 있는 것인지

냇가의 돌침대 위에서 오수(午睡)라도 즐기고 싶은 것인지

걸으면서도 잠든 것 같은 보폭으로 느릿느릿 걸어간다

꼭 술통 속을 빠져나온 디오게네스처럼

물과 구름의 운행(運行) 따라 걷는 운수납행처럼

등에 짊어진 집, 세상에게 던져주고

입어도 벗은 것 같은 납의(納衣) 하나로 떠도는

그 우주율의 발걸음으로 느리게 느리게 걸어간다

 

그 모습이 안쓰러워 아내가 냇물에 씻고 있는 배추 잎사귀 하나를 알몸 위에 덮어주자

민달팽이는 잠시 멈칫거리다가, 귀찮은 듯 얼른 나뭇잎 덮개를 빠져나가버린다

치워라, 그늘!

 

- 민달팽이 / 김신용

 

시인은 열네 살 때 집을 나와 부랑아로 30여 년을 살았다고 한다. 지게 지고, 날품 팔고, 노숙하며 살았던 시인을 사람들은 '지게꾼 시인'이라 부른다. 그 험한 세월 속에서도 남산도서관에 올라 책을 읽고, 홀로 시를 공부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내외가 함께 수의를 짜며 쌀을 벌었고, 그렇게 번 돈으로 시를 썼다. 지금도 부부는 20여만 원으로 한 달을 산다고 한다.

 

이 시의 민달팽이는 바로 시인 자신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시는 단순히 느림의 미학을 그리는 것이 아니다. 이 시에는 생명의 존엄함과 엄숙함이 숨어있다. 그리고 알몸으로 세상과 부딪치는 민달팽이의 상처와 아픔또한잊어서는 안 되겠다. 이 시의 백미는 역시 마지막 구절의 '치워라, 그늘!'이다. 이 외침은 시인의 자존심이며, 한 생명의 오기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핼쓱해진 얼굴에 머리칼이 많이 빠져서 나타났다. 속 모르고 누구와 닮았다고 농담을 했었는데, 알고 보니 지금 힘든 투병 중이다. 언제나 밝고 명랑한 친구였는데..... 친구가 힘든 시기를 잘 이겨내고 완쾌되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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