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샌. 2006. 6. 21. 10:13

햇볕에 드러나면 짜안해지는 것들이 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흰 쌀밥에 햇살이 닿으면 왠지 슬퍼진다

실내에 있어야 할 것들이 나와서 그렇다

트럭 실려 가는 이삿짐을 보면 그 가족사가 다 보여 민망하다

그 이삿짐에 경대라고 실려 있고, 거기에 맑은 하늘이라도 비칠라치면

세상이 죄다 언짢아 뵌다 다 상스러워 보인다

 

20대 초반 어느 해 2월의 일기를 햇빛 속에서 읽어보라

나는 누구에게 속은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진다

나는 평생을 2월 아니면 11월에만 살았던 것 같아지는 것이다

 

- 햇볕에 드러나면 슬픈 것들 / 이문재

 

인생은 고단하고 슬프다. 겉으로는 웃음으로 가리고 있지만 속으로 들어가면 우리는 모두 외롭고 아픈 존재들이다.속을 감추려 우리는 양파처럼 수많은 껍질로 내면을 감싸고 있는지 모른다.

인생의 추레함이 드러난 모습은 우리를 슬프게 한다. 그것이 부끄러운 일은 아니건만 왠지 내 속살이 드러나는 것처럼 민망해진다. 젊은 시절의 일기를 다시 읽게 될 때도 마찬가지다.

 

비가 내린다.

이런 날은 내 마음에 잔인한 햇볕이 비친다. 그러면 숨어있어야 할 것들이 드러나 나를 슬프고 우울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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