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 이기철

샌. 2006. 6. 15. 15:07

벚꽃 그늘 아래 잠시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입던 옷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햇살처럼 쨍쨍한 맨몸으로 앉아보렴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구름처럼 하이얗게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그러면 늘 무겁고 불편한 오늘과

저당 잡힌 내일이

새의 날개처럼 가벼워지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벚꽃 그늘 아래 한 며칠

두근거리는 생애를 벗어 놓아보렴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바람처럼 잘 씻긴 알몸으로 앉아보렴

더 걸어야 닿는 집도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도

도전처럼 초조한 생각도

늘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벚꽃 그늘처럼 청정하게 앉아보렴

 

그러면 용서할 것도 용서받을 것도 없는

우리 삶

벌떼 잉잉거리는 벚꽃처럼

넉넉해지고 싱싱해짐을 알 것이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지길 원하거든

이미 벚꽃 스친 바람이 노래가 된

벚꽃 그늘로 오렴

 

- 벚꽃 그늘에 앉아보렴 / 이기철

 

계속 반복되는 '... 벗어놓고'와 '... 앉아보렴'의 울림이 크다.

앉는다는 것은 휴식의 자세면서 수동의 자세다. 걷거나 뛰는 자세와는 본질적으로 다르다. 일 보다는 쉼을 택하는 모습이고, 말을 하기 보다는 말을 들으려는 모습이다.

 

시인은 벗어놓고 앉으라고 한다.

 

입던 옷 신던 신발 벗어놓고,

누구의 아비 누구의 남편도 벗어놓고,

직업도 이름도 벗어놓고,

본적도 주소도 벗어놓고,

그리움도 서러움도 벗어놓고,

사랑도 미움도 벗어놓고,

더 걸어야 할 집, 더 부서져야 완성되는 하루, 초조한 생각, 가볍기만 한 적금통장도 벗어놓고,...... 앉으라고 한다.

 

그러면 우리의 몸과 마음이 넉넉해지고 싱싱해진다고 한다. 그대 흐린 삶이 노래처럼 즐거워진다고 한다.

 

이 시를 나직히 소리내어 읽다보면 자연스레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진다.

벗어놓는 일이, 그리고 꽃그늘 아래 가만히 앉아있는 일이 쉽지 않은 줄 알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벚꽃 그늘로 가고 싶은 것이다. 거기 가면 내 몸과 마음의 평화를 찾을 것 같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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