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길의 노래 / 이기철

샌. 2006. 5. 24. 13:04

내 마지막으로 들 집이 비옷나무 우거진 기슭이 아니면 또 어디겠는가

연지새 짝지어 하늘 날다가 깃털 하나 떨어뜨린 곳

어욱새 속새 덮인 흙산 아니고 또 어디겠는가

 

마음은 늘 욕심 많은 몸을 꾸짖어도

몸은 제 길들여온 욕심 한 가닥도 놓지 않고 붙든다

도시 사람들 두릅나무 베어내고 그곳에 채색된 丹靑 올려서

다람쥐 들쥐들 제 짧은 잠, 추운 꿈 꿀 穴居마저 줄어든다

 

먼 곳으로 갈수록 햇빛도 더 멀리 따라와

내 여린 어깨를 토닥이는 걸 보면

내 어제 분필과 칠판 앞에서만 열렬했던 말들이

가시 되어 일어선다

 

산골 처녀야, 눈 시린 十字繡 그만두고

여치 메뚜기 날개 접은 들판 콩밭 누렁잎 보아라

길 끝에 무지가 차라리 편안인 산들이 누워 있고

산 끝에 예지도 거추장스러운 피라미들에게 맡겨버린

물이 마음 풀고 흐르고 있다

 

내 이 길 억새 속으로 걸어가면

배춧잎 같은 정맥 돋은 손을 쉬고

늘 내일로만 가는 신발을 벗어 한 사흘 나뭇가지에 걸어둘 수 있을까

내 늑골 밑에서 보채던 달력과 일과표와

눈 닿으면 풍금 소리를 내며 일어서던 글자들도

등 두드려 한 열흘 잠 재울 수 있을까

 

먼저 간 발자욱들이 내 발길에 지워지고

내 발자국 또한 뒤 이은 발길에 이내 지워지고 말

한쪽 끝에는 大邱를 달고 다른 쪽에는 銀海寺 솔바람 소리를 달고 있는 길

 

- 길의 노래 / 이기철

 

어떤 사람은 도시의 아스팔트 위에서 춤을 추고, 어떤 사람은 히말라야의 설산을 오른다. 애써 사막길을 찾아 나선 사람도 있다. 우리가 가는 길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저 안개 낀 산길의 끝은 무엇일까?

 

사다리타기처럼 우리는 한 길을 선택하지만 그 길이 어디로 연결되는지는 모른다. 우리는 서로 얽히고설켜서 자신의 길을 간다. 장난꾸러기신이라면모든 길 끝에다 '꽝'을 만들어 놓았을것이다. 신이 더 짖궂다면 어떤 사람들이 믿는대로 예비된 자들을 위한 낙원을 준비해 두었을 수도 있다.

 

사람들은 길 위에서 길을 묻는다. 나는 솔바람 향기에 끌려 오솔길에 들어서서 역시 길의 의미를 묻는다. 길의 의미를 묻는다는 것은 질문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이것이 답이라고 확신하는 순간미혹의 덫에 빠지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부르는 길의 노래는 그리움과 슬픔의 노래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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