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정선 가는 길 / 박세현

샌. 2006. 4. 7. 14:21

1

 

걸어서 가보아야 할 땅

죽기 전에 가보아야 할 지명

신작로를 따라 터벅대며 가보아야 할 국토

작은 절망 큰 절망

풀뿌리처럼 엉겨사는 곳

봄이 오면 잊었던 꽃들 되살아오고

사람들 비탈진 밭에 나가 씨앗을 뿌리는 나라

씨앗은 그들의 한 됫박 숨찬 꿈이다

 

강원도 정선

사람의 이름으로 가보아야 할 마을

도라지꽃 같은 땅

삭은 부처 토막 같은 땅

자 이제 떠나자

우리의 여행에 끝없는 새 길이 열리기를

 

2

 

청량리발 정선행 10시 30분

사람들은 떠난다 손을 흔들며 손을 접으며

고개를 들고 고개를 숙이고 서울을 나간다

사내는 그들 틈에 끼어 떠나면서

다시 돌아올 기약을 잊는다

가자, 떠나는 자가 남아있는 자들을 전송하리라

죽은 자가 산 자를 제사 지내리라

가자, 오늘은 저 멀리 더 멀리 멀리까지 달려가자

다시 돌아오지 못할 심연의 끝으로 다가가듯

미지의 땅에서 마침내 소멸하고 싶은 마음으로

차창 밖을 향하면 서울은 오월이고 화창하다

 

여전히 버스와 승용차들은 빨리 달리기를 하고

공장의 굴뚝이 구역질을 토하고 있는 낙원

사람들은 오늘의 주식 시세에 귀 기울이고

머리띠를 바꿔맨 시위대는 새로운 팀웍으로 진출하고

텔레지젼은 체육 중계에 여념이 없다

빌어먹을 서울 서울 서울

물러가라 소리쳐도 아무도 물러가지 않는 도시

저 쓸쓸하고 씩씩한 사람들 틈에서 내가 살았던가

늙은 개처럼 쓸쓸하게 살았단 말인가

경상도에서 전라도에서 강원도에서 허겁지겁 올라와

집을 짓고 사무실을 개설하고 주먹질을 하고

강도가 되고 국회의원이 되고 창녀가 되고

돈을 만들고 돈을 위조하고 말을 만들고 말을 조작하고

물심양면으로 나누었던 아기자기한 악의 협동

 

나는 이제 떠나간다 떠나리라

잠시인지 영원인지 기약 없는 채로

올동 말동한 여행의 출발점에서

지도의 한 지점으로 달려간다 달려가리라

안녕. 서울. 안녕. 사랑. 안녕. 도덕. 안녕. 꿈.

안녕하라 급조된 서울의 발가벗은 평화여

그대들 인간적인 위선의 에드벌룬이여

늙은 노동자처럼 씩씩대는 기차의 등골 위로 해가 진다

떠나자 떠나자 그러나 유혹이듯 등허리에 대고

속삭이는 다정한 이웃들

조용한 방 있어요 쉬다 가세요

기본이 만 원입니다 영계 있어요

입구에서 대머리를 찾아주세요

남녀 파트너 짝지워줍니다

영계라니 어린 병아리 말이냐

서울을 비우는 동안 당신들은 삼계탕이나 끓이고 있거라

안녕. 기차의 긴 울음이 도시의 마지막 흐름인 양 거칠다

 

3

 

정선으로 가는 길

자잘한 꿈들을 잠재우고 태백선 열차에 오르는 순간

나의 숙맥 같은 혈기는 풀대궁이 되어 흔들린다

어디에 꽂힌들 이 국토의 한구석이라면

쉬 잠들지 못하랴

37도 5분의 체온이 스며있는 땅이라면 어김없이

달려가야 한다

이 땅에서 느낀 소외와 수모와 순간순간의 절망감을

쓰러뜨릴 수 있는 땅이 혹 있다면

기차가 닿고 완행버스가 닿고 지친 저녁이 다다르는 마을

그 감격의 땅으로 가야 한다

피로하고 지친 육신과 마른버짐 같은 꿈을 풀어놓으리라

 

시계는 10시 50분

지상의 시간 인간의 시간 문명의 시간

사람들이 합의하며 계산한 시간 너머로

껑충껑충 건너뛰며 달려가자

아직 꺼지지 않고 있을 등잔불의 마을을 향해

태백산맥의 깊은 계곡을 향해

자 가자

 

- 정산 가는 길 / 박세현

 

이런 시를 읽으면 가슴이 뛴다. 오늘은 어느 땅에서도 연꽃을 피울 수 있다고 말하지 말라. 어디에 살든 마음에 달렸다고 자위하듯 달래지 말라. 언젠가는 허위와 가식의 시간을 뒤로 하고저 등잔불의 마을을 향해 떠나는 기차의 기적 소리에 몸을 실을 것이다.

 

사랑하는 이여....

그대와 나는

산골로 가자.

출출이 우는 깊은 산골로 가 마가리에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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