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어디에다 고개를 숙일까 / 김용택

샌. 2006. 8. 1. 09:46

어디에다가 고개를 숙일까

아침 이슬을 털며 논길을 걸어오는 농부에게

언 땅을 뚫고 돋아나는 쇠뜨기풀에게

얼음 속에 박힌 지구의 눈 같은 개구리 알에게

길어나는 올챙이 다리에게

날마다 그 자리로 넘어가는 해와 뜨는 달과 별에게 그리고 캄캄한 밤에게

저절로 익어 툭 떨어지는 살구에게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둥그렇게 앉아 노는 동네 아이들에게

풀밭에 가만히 앉아 되새김하는 소에게

고기들이 왔다갔다하는 강물에게

호미를 쥔 우리 어머니의 흙 묻은 손에게

그 손 엄지손가락 둘째 마디 낮에 나온 반달 같은 흉터에게

날아가는 호랑나비와 흰나비와 제비와 딱새에게

저무는 날 홀로 술 마시고 취한 시인에게

눈을 끝까지 짊어지고 서 있는 등 굽은 낙락장송에게

날개 다친 새와

새 입에 물린 파란 벌레에게

비 오는 가을 저녁 오래된 산골 마을 뒷산에 서서 비를 다 맞는 느티나무에게

 

나는 고개 숙이리

 

- 어디에다 고개를 숙일까 / 김용택

 

나는 다시 자본과 권력 앞에 고개 숙이지 않으리. 욕망 앞에 무릎 꿇지도 않으리. 그리고 도시의 가짜 신에게도 경배하지 않으리. 대신 살아있는 생명들에게 고개 숙이리. 그들의 작고 약함을 사랑하리.

 

'날개 다친 새와

새 입에 물린 파란 벌레에게

비 오는 가을 저녁 오래된 산골 마을 뒷산에 서서 비를 다 맞는 느티나무에게'....... 나는 고개 숙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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