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독거(獨居) / 이원규

샌. 2006. 4. 25. 14:53

남들 출근할 때

섬진강 청둥오리 떼와 더불어

물수제비를 날린다

남들 머리 싸매고 일할 때

낮잠을 자다 지겨우면

선유동 계곡에 들어가 탁족을 한다

미안하지만 남들 바삐 출장 갈 때

오토바이를 타고 전국 일주를 하고

정말이지 미안하지만

남들 야근 할 때

대나무 평상 모기장 속에서

촛불을 켜놓고 작설차를 마시고

남들 일중독에 빠져 있을 때

나는 일 없이 심심한 시를 쓴다

그래도 굳이 할 일이 있다면

가끔 굶거나 조금 외로워하는 것일 뿐

사실은 하나도 미안하지 않지만

내게 일이 있다면 그것은 노는 것이다

일하는 것이 곧 죄일 때

그저 노는 것은 얼마나 정당한가

스스로 위로하고 치하하며

섬진강 산 그림자 위로

다시 물수제비를 날린다

이미 젖은 돌은 더 이상 젖지 않는다

 

- 독거(獨居) / 이원규

 

나는 자본이 돌리는 거대한 수레바퀴의 한 부속품일 뿐이다. 열심히 산다는 것은 자본의 노예로서의 역할에 충실하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도리어 체제의 충직한 나팔수가 되어 어린 생명들을 재촉하고 있다.그리고 거기서 나오는 부스러기를 얻어먹으며 연명하고 있다.

 

이젠 세상이 요구하는 정형의 틀에서 벗어나고 싶다. 세상의 가르침에 대해 반기를 들고 싶다. 지리산의 시인과 같은 백수로서의 저항을 하고 싶다.일 없으면 살지 못한다는 사람에게 놀면서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가짜의 자유 말고, 관념으로서의 자유 말고, 진정한 인간 해방의 자유를 누리고 싶다.

 

그러나 자유는 피를 먹고 자란다. 이 말은 정치적인 의미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도 마찬가지다.

내면의 치열함, 내면의 피흘림이 없다면 어찌 자유를 획득할 수 있으랴. 단순히 꿈 꾸는 것 만으로는 자유는 거저 주어지지 않는다.

 

'젖은 돌은 더 이상 젖지 않는다' - 오기 서린 시인의 음성이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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