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0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칼릴 지브란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그래서 하늘 바람이 너희 사이에서 춤추게 하라 서로 사랑하라 그러나 사랑으로 구속하지는 말라 그보다 너희 혼과 혼의 두 언덕 사이에 출렁이는 바다를 놓아 두라 서로의 잔을 채워 주되 한쪽의 잔만을 마시지 말라 서로의 빵을 주되 한쪽의 빵만을 먹지 말라 함께 노래하고 춤추며 즐거워하되 서로는 혼자 있게 하라 마치 현악기의 줄들이 하나의 음악을 울릴지라도 줄은 서로 혼자이듯이 서로 가슴을 주라 그러나 서로의 가슴속에 묶어 두지는 말라 오직 큰 생명의 손길만이 너희의 가슴을 간직할 수 있다 함께 서 있으라 그러나 너무 가까이 서 있지는 말라 사원의 기둥들도 서로 떨어져 있고 참나무와 삼나무는 서로의 그늘 속에선 자랄 수 없다 - 함께 있되 거리를 두라 / 칼릴 지브란 옛날에는 무슨 행사..

시읽는기쁨 2007.06.15

논둑에서 울다 / 이승희

이상하지? 여기만 오면 고해성사하고 싶어져. 논둑에 앉아서, 그냥 똥 누는 자세로 앉아서 보면 살아 있는 죄 낱낱이 고백하고, 용서라는 말도 여기에서 듣고 싶어져. 어떤 성자가 다녀가셨나? 얕은 물속 물방울 같은 발자국들, 아 사람의 역사가 저리 아름다우니 내 눈물 보여도 괜찮으리. 잘못 살아 미안하다고 중얼거리지 말고 논둑에 앉아볼 일이다. - 논둑에서 울다 /이승희 언젠가 고속도로를 타고 가다가 길 옆에 서있는 '기업천하지대본(企業天下之大本)'이라는 광고판을 보고 놀란 일이 있었다. 이제 세상은완전히 노골적이 되었다. '기업 하기 좋은 나라'라는 광고도 이젠 더 이상 낯설지 않다. '행복한 나라' '아름다운 나라'는 이제 구호로라도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이런 물신(物神)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농업이..

시읽는기쁨 2007.06.13

한산도야음(閑山島夜吟) / 이순신

水國秋光暮 警寒雁陳高 憂心轉輾夜 殘月照弓刀 - 閑山島夜吟 / 李舜臣 한 바다에 가을빛 저물었는데 찬바람에 놀란 기러기 높이 떴구나 가슴에 근심 가득 잠 못 드는 밤 새벽 달 창에 들어 활과 칼 비추네 '영남의 여러 배에서 격군과 사부들이 거의 굶어 죽게 되었다. 참혹하여 들을 수가 없다.' '살을 에이듯이 추운 날이다. 옷 없는 병졸들이 움츠리고 앉아 추위에 떨고 있다. 군량은 바닥났다. 군량은 오지 않았다.' 이 시가 쓰여질 당시에 기록된 난중일기의 한 부분이다. 장군은 안팎으로 적대자들에게 둘러싸여 있었을 것이다. 백성과 병사들의 처지는 참혹했고, 나라로부터는 아무 지원도 못 받고 있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는 조정 역시 장군의 편이 아니었다. 전쟁에 이긴다고 해도 그분의 미래는 불확실했다. 그 당..

시읽는기쁨 2007.06.08

기도 / 서정주

저는 시방 꼭 텡 비인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텡 비인 들녘 같기도 합니다 주여 (이렇게밖엔 당신을 부를 길이 없습니다) 한동안 더 모진 광풍을 제 안에 두시든지 몇 마리의 나비를 주시든지 반쯤 물이 담긴 도자기와 같이하시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시방 제 속은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워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 기도 / 서정주 내 옆 동료는 미당을 비아냥거르듯 늘 말당이라고 부른다. 그의 친일 행적만 아니라 그 뒤에도 정권에 빌붙는 처신 때문이다. 시에서 감동을 받더라도 시인의 실제 모습을 알고나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말 따로 사람 따로인 경우가 많지만 그것이 시인에 해당될 때는 더욱 실망하게 된다. 시인이란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처럼 아름답게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기..

시읽는기쁨 2007.06.02

아득한 성자 / 조오현

하루라는 오늘 오늘이라는 이 하루에 뜨는 해도 다 보고 지는 해도 다 보았다고 더 이상 더 볼 것 없다고 알 까고 죽는 하루살이 떼 죽을 때가 지났는데도 나는 살아있지만 그 어느 날 그 하루도 산 것 같지 않고 보면 천년을 산다고 해도 성자는 아득한 하루살이 떼 - 아득한 성자 / 조오현 이런 시를 말로 설명하고 머리로 이해하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일지 모른다. 시인은, 참으로 좋은 말은 입이 없어야 할 수 있고, 참으로 좋은 말은 귀가 없어야 들을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어쩌랴, 우리는 입과 귀라는 방편을 이용해야 진리의 그림자라도 밟아볼 수 있는 것을.... 하루 속에 천년이 들어있고, 천년 또한 하루에 다르지 않다. 인간의 일생이 하루살이와 무엇이 다르랴. 백년, 천년의 물리적 시간이 의미 있는 것..

시읽는기쁨 2007.05.31

너 / 피천득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 동안 앉아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너 - 너 / 피천득 권정생 선생님에 이어 며칠 사이로 피천득 선생님마저 타계하셨다. 아흔여섯 긴 세월 동안 천진난만한 동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신 선생님의 생애는 그 자체가 한 편의 단아한 수필로 보인다. 선생님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수필'이라는 글이었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숲 속으로 난 고요한 길이다.' 이미 40년 전이지만 교과서에 실렸던 청자 연적의 사진 한 장까지 기억이 난다. 연적을 장식한꽃잎 하나가 어긋나 있었는데 바로 그 파격의 맛이 수필이라고 설명해 ..

시읽는기쁨 2007.05.27

인연설 / 한용운

함께 영원히 있을 수 없음을 슬퍼하지 말고 잠시라도 같이 있을 수 있음에 기뻐하고 더 좋아해 주지 않음을 노여워 말고 이만큼 좋아해 주는 것에 만족하고 나만 애태운다고 원망치 말고 애처롭지만 사랑을 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주기만 하는 사람이라 지치지 말고 더 줄 수 없음에 아파하고 남과 함께 즐거워한다고 질투하지 말고 그의 기쁨으로 여겨 함께 기뻐하고 이룰수 없는 사랑이라 일찍 포기하지 말고 깨끗한 사랑으로 인해 오래 간직할 수 있는 나는 당신을 그렇게 사랑하렵니다 - 인연설 / 한용운 인생이 재미있는 것은 예기치 않는 새로운 인연들과 맺어지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인생이란 만남의 연속이고, 인연의 연속이다. 그리고 만남을 우연이라고 부르기 보다는 인연이라고 보는 것이 훨씬 더 의미있고 따뜻하다. 인연이..

시읽는기쁨 2007.05.23

그날 / 정민경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시읽는기쁨 2007.05.18

거산호(居山好) / 김관식

산에 가 살래 팥밭을 일궈 곡식을 심우고 질그릇이나 구워 먹고 가끔, 날씨 청명하면 동해에 나가 물고기 몇 놈 데리고 오고 작록(爵祿)도 싫으니 산에 가 살래 - 거산호(居山好) / 김관식 밥벌이로서의 일, 처성자옥(妻城子獄)의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온갖 욕망으로 들끓는 내 속마음도 훌훌 벗어놓고 아무도 없는 산골에 들어가고 싶다. 그렇게 세상과 등진 채 살아보고 싶다. 아무도 찾아오는 사람 없는 그곳이라면 이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애증도 잠잠해질 것 같다. 졸졸 속삭이며 흐르는 물가에 할 일 없이 앉아 있으면 나는 행복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다시 사람이 그리워질까? 인간의 냄새가 그리워지기도 할까?

시읽는기쁨 2007.05.11

재춘이 엄마 / 윤제림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庵)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엄병호 재춘아, 공부 잘 해라! - 재춘이 엄마 / 윤제림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모든 어머니의 마음은 재춘이 엄마와 다르지 않으리라. 하늘이 내려준 자식 사랑의 모성애를 누가 폄하할 수 있으랴. 그러나 모진 현실은..

시읽는기쁨 2007.05.08

그 사람에게 / 신동엽

아름다운 하늘 밑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쓸쓸한 세상세월 너도야 왔다 가는구나 다시는 못 만날지라도 먼 훗날 무덤 속 누워 추억하자 호젓한 산골길의 마주친 그 날, 우리 왜 인사도 없이 지나쳤던가, 하고 - 그 사람에게 / 신동엽 사람 때문에 기뻐하고 사람 때문에 아파한다.사람은 늘 누군가를 그리워하도록 사람 속에는 심연 깊은 갈증의 샘이 들어있다. 그 사람을 만남으로써 우리는 한 걸음 더 완성된 인간으로 나아가게 되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 말하지 못하고, 미워하는 사람을 미워한다 말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그 사람은 나를 봐주지 않고, 저 멀리서 미소 짓는 여인의 얼굴을 나도 무심코 외면해 버린다. 우리는 그렇게 서걱거리며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그것이 인생....

시읽는기쁨 2007.05.03

발작 / 황지우

삶이 쓸쓸한 여행이라고 생각될 때 터미널에 나가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짐 들고 이 별에 내린 자여 그대를 환영하며 이곳에서 쓴맛 단맛 다 보고 다시 떠날 때 오직 이 별에서만 초록빛과 사랑이 있음을 알고 간다면 이번 생에 감사할 일 아닌가 초록빛과 사랑 : 이거 우주 기적 아녀 - 발작 / 황지우 오늘 아침, 초록으로 가득해진 창 밖을 바라보며 옆의 후배가 5월을 '신(神)의 계절'이라고 불렀다. "그래, 맞아! 지금은 축복의 시간, 기적의 시간이야!" 창 밖의 초록빛에 나는 아득해진다. 내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으로 나는 또 아득해진다. 아무 것도 가지고 있지 않을지라도, 모든 것을 가진 듯한 이 풍요감! 모든 것을 가지고 있을지라도, 그래도 계속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과 기다림! 그리움은 아무 형체도 ..

시읽는기쁨 2007.05.02

밑 빠진 독이기에 나는 물을 붓습니다 / 전병철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는지, 역사를 배우는 까닭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생각조차 아니 하는 아이들 앞에 새학년 금강 위로 봄바람 부는 교실에서 첫수업을 합니다 삼국통일 했다는 나라가 신라인지, 고구려인지, 백제인지 모르는 것은 커녕 관심조차 없는 농업학교 아이들 앞에 새학기 개나리 진달래꽃 환한 교실에서 역사수업을 합니다 '지금 보고 있는 시험과목의 이름을 쓰시오'라는 주관식 물음마저 공부 같은 거야 남의 일, 반 정도도 대답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이 필요 없을지라도 역사를 가르칩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들 하지만 밑 빠진 독이기에 오히려 더 물을 부어야 한다는 오기 하나로 오늘도 나는 조는 아이들 잠시라도 깨우랴 물을 부어봅니다 생각하면 주눅..

시읽는기쁨 2007.04.26

더딘 사랑 / 이정록

돌부처는 눈 한 번 감았다 뜨면 모래무덤이 된다 눈 깜짝할 사이도 없다 그대여 모든 게 순간이었다고 말하지 마라 달은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린다 - 더딘 사랑 / 이정록 시인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은 역시 다르다. 달의 차고 이지러지는 것을 윙크라고 보다니. 그렇다면 달의 윙크에 대한 지구의 대답은 무엇일까? 연모의 감정이 너무 뜨거워 화산으로 터져나오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조바심치고 수선스러운 것은 지구상의 작은 인간들밖에 없는 것 같다. 윙크 한 번 하는데 한 달이나 걸리는 더딘 사랑은 속전속결의 인간들 사랑법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마치 우리가 하루살이의 바쁜 날개짓을 바라보듯이.

시읽는기쁨 2007.04.22

대추 한 알 / 장석주

저게 저절로 붉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태풍 몇 개 저 안에 천둥 몇 개 저 안에 벼락 몇 개 저게 저 혼자 둥글어질 리는 없다 저 안에 무서리 내리는 몇 밤 저 안에 땡볕 두어 달 저 안에 초승달 몇 낱 - 대추 한 알 / 장석주 대추 한 알 속에 해가 들어있다. 달이 들어있다. 바람도 들어있고, 물도 들어있다. 그리고 내 할아버지도 들어있다. 제사를 지내고 나면 할아버지는 대추 한 웅큼을 장손자에게 집어 주셨다. 달콤한 대추를 먹으며 그때는 몰랐다. 그 속에 먼 조상들까지 숨어있는 줄 그때는 몰랐다. 저기 흰 수염으로 앉아 있는 사람, 저 사람 속에도 땡볕이 들어있고,천둥소리 들어있다. 수많은 희열과 고통이 어우러져 저 사람을 만들고 있다. 태풍을 만나고, 사막을 건너고, 힘든 고난의 길 뒤에 부드러..

시읽는기쁨 2007.04.19

그대 순례 / 고은

좀 느린 걸음걸이면 된다 갑자기 비가 오면 그게 그대 옛 친구야 푹 젖어보아라 가는 것만이 아름답다 한 군데서 몇 군데서 살기에는 너무 큰 세상 해질녘까지 가고 가거라 그대 단짝 느린 그림자와 함께 흐린 날이면 그것 없이도 그냥 가거라 - 그대 순례 / 고은 몇 달에 걸쳐 오체투지를 하며 성지를 찾아가는 티베트인들의 순례를 생각한다. 그들의 종교적 열정과 단순성이 부러울 때가 있다. 몇 달씩 생계를 놓아도 그들의 사는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가난과 자유로움이 도리어 부러울 때가 있다.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 나는 한 번도 나를 찾는 순례에 나서본 적이 없다. 일상의 무거운 짐 벗어버리고 육신을 먹여살릴 개나리봇짐 하나 메고 길 떠나본 적이 없다. 올라가는 일보다 내려가는 일이 더 중요하..

시읽는기쁨 2007.04.13

담임 선생 / 조향미

아침에 출석부 들고 교실에 들어서면 인상 쓸 일 수두룩하다 앉아라 줄 맞춰라 휴지 좀 주워라 수희 나영이 또 지각이구나 이슬인 오늘도 결석인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째려보고 전달사항 몇 개 툭 던져 두고 나오면 아이들 몇 명 쭐래쭐래 따라 나오며 선생님 오늘 야자 빠져야 해요 치과 가야 해요 생리통이 심해요 학원 보충 있어요 엄마 생신이에요 알았어 알았어 점심시간에 내려와 교직 이십년 의욕도 열정도 시들해진 담임 생활 올해 애들은 유난히 천방지축이야 투덜대지만 생각해보면 마음으로 미운 놈 하나 없다 작년 처음 만나 일주일에 두어 시간 수업할 땐 저기 몇 놈들 정말 고운 구석 없이 밉상이더니 담임 맡은 올해 사흘 걸러 지각하고 결석하는 놈도 온 교실 제멋대로 어지르고 다니는 놈도 수업시간 꾸벅꾸벅 잠만 자는 ..

시읽는기쁨 2007.04.09

야생 피조물의 평화 / 웬델 베리

세상에 대한 절망이 마음속에 자라날 때 나와 우리 아이들의 삶이 어찌될까 두려워 한밤중 아주 작은 소리에도 눈을 뜨게 될 때 나는 걸어가 몸을 누이네, 야생오리가 물 위에 자신의 아름다움을 내려놓은 그곳에, 큰왜가리가 사는 그곳에 나는 야생 피조물들의 평화 속으로 들어가네 그들은 슬픔을 앞질러 생각하면서 자신들의 삶을 괴롭히지 않는다네 나는 고요한 물의 존재에게로 가네 그리고 느낀다네. 내 머리 위로 낮엔 보이지 않던 별들이 이제 반짝이려고 기다리고 있음을 잠시 세상의 은총 속에 쉬고 나면 나는 자유로워지네 - 야생 피조물의 평화 / 웬델 베리 웬델 베리(Wendell Berry)라는 이름은 환경서적 등을 통해서 단편적으로 접했지만 그분의 저서를 읽어본 적은 없었다. 그리고 그분이 소설가며 시인으로 많은..

시읽는기쁨 2007.04.02

자비 / 이경

잘 썩어 부드러운 흙에 골을 내어 눈이 빨간 무씨를 넣고 재를 지내는 마음으로 흙을 덮는다 까치가 쏘물다고 잔소리를 한다 우리가 가고 나면 내려와 솎아먹을 것이다 씨를 묻고 내려온 뒷날 밤 마침맞게 천둥번개 치고 봄비 내린다 이건 썩 잘 된 일이다 봄비가 씨앗 든 밭을 측은측은 적시는 일만큼 크고 넉넉한 자비를 본 적이 없다 모종을 얻은 밭의 기쁨이나 밭을 얻은 모종의 기뿜이 막상막하다 심어놓고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저만치 물러서야 한다 - 자비 / 이경 이 시를 읽으면 농사는 성스러운 제의(祭儀)와 같다. 지금은 헛간에나 쳐박혀 있을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새삼 눈물겹게 다가온다. 근원적 의미에서 이런 농사를 짓는 농부는 이젠 시골에서도 만나기 힘들다. 올해는 흙을 밟을 일도 없게 생겼다. 뿌리..

시읽는기쁨 2007.03.29

거미줄 / 손택수

어미 거미와 새끼 거미를 몇 킬로미터쯤 떨어뜨려 놓고 새끼를 건드리면 움찔 어미의 몸이 경련을 일으킨다는 이야기,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내게도 있어 수천 킬로 밖까지 무선으로 이어져 있어 한밤에 전화가 왔다 어디 아픈데는 없냐고, 꿈자리가 뒤숭숭하니 매사에 조신하며 살라고 지구를 반 바퀴 돌고 와서도 끊어지지 않고 끈끈한 줄 하나 - 거미줄 / 손택수 눈에 보이지 않는 거미줄이 어디 부모 자식 사이에만 있겠는가. 모든 존재들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끈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 우리는 모두 거대한 네트워크의 일원이다. 내가 지금 여기서 생각하고 행위하는 모든 것이 전 우주의 존재들에게 파문을 일으킨다. 우리 모두는 서로가 하나로 이어진 존재들이다. 오늘 내가 이렇게 우울한 건 멀리 있는 당신이 그 무언가로 ..

시읽는기쁨 2007.03.23

孤島를 위하여 / 임영조

면벽 100일! 이제 알겠다. 내가 벽임을 들어올 문 없으니 나갈 문도 없는 벽 기대지 마라! 누구나 돌아서면 등이 벽이니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마음속 집도 절도 버리고 쥐도 새도 모르게 귀양 떠나듯 그 섬에 닿고 싶다 간 사람이 없으니 올 사람도 없는 섬 뜬구름 밀고 가는 바람이 혹시나 제 이름 부를까 싶어 가슴 늘 두근대는 절해고도絶海孤島여! 나도 그 섬에 가고 싶다 가서 동서남북 십리허에 해골 표지 그려진 금표비禁標碑 꽂고 한 십년 나를 씻어 말리고 싶다 옷 벗고 마음 벗고 다시 한 십년 볕으로 소금으로 절이고 나면 나도 사람 냄새 싹 가신 등신等神 눈으로 말하고 귀로 웃는 달마達磨가 될까? 그 뒤 어느 해일 높은 밤 슬쩍 체위體位 바꾸듯 그 섬 내쫓고 내가 대신 엎드려 용서를 빌고 나면 나도 ..

시읽는기쁨 2007.03.20

성공시대 / 문정희

어떻게 하지? 나 그만 부자가 되고 말았네 대형 냉장고에 가득한 음식 옷장에 걸린 수십 벌의 상표들 사방에 행복은 흔하기도 하지 언제든 부르면 달려오는 자장면 오른발만 살짝 얹으면 굴러가는 자동차 핸들을 이리저리 돌리기만 하면 나 어디든 갈 수 있네 나 성공하고 말았네 이제 시만 폐업하면 불행 끝 시 대신 진주목걸이 하나만 사서 걸면 오케이 내 가슴에 피었다 지는 노을과 신록 아침 햇살보다 맑은 눈물 도둑고양이처럼 기어오르던 고독 다 귀찮아 시 파산 선고 행복 벤처 시작할까 그리고 저 캄캄한 도시 속으로 폭탄같이 강렬한 차 하나 몰고 미친 듯이 질주하기만 하면 - 성공시대 / 문정희 부자 나라 신민들은 다 행복하여라! 그들의 인사는 "부자 되세요!"이고, 그들의 종교는 맘몬, 행동강령은 경쟁과 거침없는 ..

시읽는기쁨 2007.03.15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 오규원

잠자는 일만큼 쉬운 일도 없는 것을, 그 일도 제대로 할 수 없어 두 눈을 멀뚱멀뚱 뜨고 있는 밤 1시와 2시의 틈 사이로 밤 1시와 2시의 空想의 틈 사이로 문득 내가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이 내 머리에 찬물을 한 바가지 퍼붓는다 할 말 없어 돌아누워 두 눈을 멀뚱하고 있으면 내 젖은 몸을 안고 이왕 잘못 살았으면 계속 잘못 사는 방법도 방법이라고 악마 같은 밤이 나를 속인다 - 문득 잘못 살고 있다는 느낌이 / 오규원 몸은 맥이 빠지고, 마음은 천근이나 되는 양 무겁다. 거대한 장벽이 나를 둘러싸고 있어 꼼짝도 못한다. 몸부림을 쳐보지만 그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 악몽이 낮의 생활로 연결된다. 가치있다고 믿었던 삶이 무너지고 다시 혼돈 속에 빠졌다. 어떻게 살아야 제대로 사는 것일까..

시읽는기쁨 2007.03.11

비가 오려 할 때 / 문태준

비가 오려 할 때 그녀가 손등으로 눈을 꾹 눌러 닦아 울려고 할 때 바람의 살들이 청보리밭을 술렁이게 할 때 소심한 공증인처럼 굴던 까만 염소가 멀리서 이끌려 돌아올 때 절름발이 학수형님이 비료를 지고 열무밭으로 나갈 때 먼저 온 빗방울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펼 때 - 비가 오려 할 때 / 문태준 그녀가 뒤돌아 앉아 소리 없이 운다. 가끔씩 휴지통의 휴지만 조심스레 뽑혀나갈 뿐이다. 그녀에게는 그것이 무척 서러운가 보다.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그녀의 눈물이 비를 부른다. 그래서 비 오기 전의 수런거림으로 마음은 바빠진다. 산다는 건 이렇듯 어쩔 수 없이 수런거리는 것이다. 그녀가 소리도 없이 울고, 나는 뒤에서 아프게 지켜 보고, 어느새 먼저 온 빗방울들이 개울물 위에 둥근 우산을 만들고 ..

시읽는기쁨 2007.03.06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 박목월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결에는 싱그러운 미나리 냄새가 풍긴다 해외로 나간 친구의 체온이 느껴진다 참으로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골목길에는 손만 대면 모든 사업이 다 이루어질 것만 같다 동 서 남 북으로 틔어있는 골목마다 수국색 공기가 술렁거리고 뜻하기 않게 반가운 친구를 다음 골목에서 만날 것만 같다 나도 모르게 약간 걸음걸이가 빨라지는 어제 오늘 어디서나 분홍빛 발을 아장거리며 내 앞을 걸어가는 비둘기를 만나게 된다 - 무슨 일을 하고 싶다 - 엄청나고도 착한 일을 하고 싶다 -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2월에서 3월로 건너가는 바람 속에는 끊임없이 종소리가 울려오고 나의 겨드랑이에 날개가 돋아난다 희고도 큼직한 날개가 양 겨드랑이에 한 개씩 돋아난다 - 3월로 건너가는 길목에서 / ..

시읽는기쁨 2007.03.02

가던 길 멈춰 서서 / W. H. 데이비스

근심에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얼마나 슬픈 인생일까? 나무 아래 서 있는 양이나 젖소처럼 한가로이 오랫동안 바라볼 틈도 없다면 숲을 지날 때 다람쥐가 풀숲에 개암 감추는 것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햇빛 눈부신 한낮, 밤하늘처럼 별들 반짝이는 강물을 바라볼 틈도 없다면 아름다운 여인의 눈길과 발 또 그 발이 춤추는 맵시 바라볼 틈도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한 그녀의 미소가 입술로 번지는 것을 기다릴 틈도 없다면 그런 인생은 불쌍한 인생 근심으로 가득 차, 가던 길 멈춰 서서 잠시 주위를 바라볼 틈도 없다면 - 가던 길 멈춰 서서 / W. H. 데이비스 William Henry Davies(1871-1940)는 영국의 '걸인 시인'으로 알려져 있다. 어렸을 때 부모를 여의고..

시읽는기쁨 2007.02.23

이웃 / 이정록

아이들이 공부하고 있으니 두부장수는 종을 흔들지 마시고 행상트럭은 앰프를 꺼주시기 바랍니다 크게 써서 학교 담장에 붙이는 소사아저씨 뒤통수에다가 담장 옆에 사는 아줌마 아저씨들이 한마디씩 날린다 공일날 운동장 한번 빌려준 적 있어 삼백육십오일 스물네 시간 울어대는 학교 종 한번 꺼달란 적 있어 학교 옆에 사는 사람은 두부도 먹지 말란 거여 꽁치며 갈치며 비린 것 한번 맛볼라치면 버스 타고 장에까지 갔다오란 거여 차비는 학교에서 내줄 거여. 도대체 생명이 뭔지나 알고 분필 잡는 거여 호박넝쿨 몇개 얹었더니 애들 퇴학시키듯 다 잘라버린 것들이 말 못하는 담벼락 가슴팍에 못질까지 하는 거여 애들이 뭘 보고 배울 거여. 이웃이 뭔지 이따위로 가르쳐도 된다는 거여 - 이웃 / 이정록 교육문제에 대해 누구나 일가견..

시읽는기쁨 2007.02.20

조용한 이웃 / 황인숙

부엌에 서서 창 밖을 내다본다 높다랗게 난 작은 창 너머에 나무들이 살고 있다 나는 이따금 그들의 살림살이를 들여다본다 잘 보이지는 않는다 까치집 세 개와 굴뚝 하나는 그들의 살림일까? 꽁지를 까닥거리는 까치 두 마리는? 그 나무들은 수수하게 사는 것 같다 하늘은 그들의 부엌 지금의 식사는 얇게 저며서 차갑게 식힌 햇살이다 그리고 봄기운을 한두 방울 떨군 잔잔한 바람을 천천히 오래도록 삼키는 것이다 - 조용한 이웃 / 황인숙 나무보다 더 아름다운 시는 없다고 어느 시인은 노래했다. 시인 또한 부엌 창 밖으로 보이는 나무를 통해 성자의 모습을 보고 있다. 그들 식탁에 오른 것은 햇살과 바람이다. 반면에 시인은 부엌에서 음식을 장만하며 인간 식탁의 탐욕과 살육을 새삼스레 느꼈을지 모른다. 어제 저녁 전체 회..

시읽는기쁨 2007.02.15

기탄잘리 39 / 타고르

가슴이 굳어 바싹 마를 때엔 자비의 소나기와 더불어 오십시오 우아함이 생활에서 잃어질 때엔 드높은 노랫소리 더불어 오십시오 시끄러운 일이 사방에서 극성 떨며 나를 가둬버릴 때엔 말없는 주여 님의 평화와 휴식을 가지고 내게로 오십시오 구석에 갇히어서 내 거지 같은 마음이 웅크리고 앉아 있을 때엔 왕이여 이 문을 부수어 여시고는 왕의 위의를 갖추고 오십시오 욕망이 마음을 망상과 먼지로 눈멀게 할 땐 오, 거룩한 이여, 깨어 있는 자여 님의 빛과 우레를 가지고 오십시오 - 기탄잘리 39 / 타고르 103 편의 노래로 된 기탄잘리(Gitanjali)는 '신에게 바치는 노래'라는 뜻이라고 한다.신을 향한 인간의 순수한 종교심만큼 귀하고 아름다운 것도 없다. 타고르는 힌두교 신자이지만 그가 노래한 신이 우리와 다른..

시읽는기쁨 2007.02.11

머위 / 문인수

어머니 아흔셋에도 홀로 사신다 오래 전에 망한 장남 명의의 아버지 집에 홀로 사신다 다른 자식들 또한 사정 있어서 홀로 사신다 귀가 멀어 깜깜 소태 같은 날들을 사신다 고향집 뒤꼍엔 머위가 많다 머위 잎에 쌓이는 빗소리도 열두 권 책으로 엮고도 남을 만큼 많다 그걸 쪄 쌈 싸먹으면 쓰디쓴 맛이다 아 낳아 기른 죄 다 뜯어 삼키며 어머니 홀로 사신다 - 머위 / 문인수 고향에 홀로 계시는 어머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리다. 평생을 억척스레 농사 지으며 5남매를 키우셨는데, 여든 가까이 된 나이에 자식도 손주도 곁에 없다. 어머니 역시 '자식 낳은 죄'의 업보를 쓴 외로움으로 갚아 나가신다. 늙으신 부모를 안타까워하는 자식 또한 밑의 자식을 낳은 천형을 짊어져야 한다. 어차피 인생은 머위 잎처럼 쓰디쓴 맛이다..

시읽는기쁨 2007.02.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