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밑 빠진 독이기에 나는 물을 붓습니다 / 전병철

샌. 2007. 4. 26. 11:01

역사를 왜 배워야 하는지, 역사를 배우는 까닭이 무엇인지

모르는 것은 고사하고 아예 생각조차 아니 하는 아이들 앞에

새학년 금강 위로 봄바람 부는 교실에서 첫수업을 합니다

삼국통일 했다는 나라가 신라인지, 고구려인지, 백제인지

모르는 것은 커녕 관심조차 없는 농업학교 아이들 앞에

새학기 개나리 진달래꽃 환한 교실에서 역사수업을 합니다

'지금 보고 있는 시험과목의 이름을 쓰시오'라는 주관식 물음마저

공부 같은 거야 남의 일, 반 정도도 대답하지 않는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친다는 것이 필요 없을지라도 역사를 가르칩니다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일이

아무런 소용이 없다고들 하지만

밑 빠진 독이기에 오히려 더 물을 부어야 한다는

오기 하나로 오늘도 나는

조는 아이들 잠시라도 깨우랴 물을 부어봅니다

생각하면 주눅들고 버려진 모습

마치 내가 사는 땅과 같아

밑바닥까지 드러낸 강

아아 작은 눈물이나마 쏟아봅니다

고인 물은 썩기 쉽고

흐르는 물만이 흘러 땅 속 거름이 됩니다

밑 빠진 독이라고 푸대접이지만

밑 빠진 독이기에 거름이 되고 바닥이 됩니다

바닥이 되어 강물을 흐르게 하고

바닥이기에 강물과 함께 합니다

 

- 밑 빠진 독이기에 나는 물을 붓습니다 / 전병철

 

사는 것이란 많은 부분이 오기로 버텨내는 일이다. 이대로 쓰러질 순 없지, 누가 이기나 끝까지 가보자며 이 악물고 버티는 일이다. 하루 일을 마치고 나면 허망한 한숨만 남아도 죽자사자 버텨보는 일이다.

 

쉼없이 바위를 져날라야 하는 시지푸스처럼, 진짜 밑 빠진 독에 물붓기를 한 콩쥐처럼, 들어주는 사람 없는 고독한 예언자의 사막에서 외치는사자후처럼, 우리는 그래도 지고, 나르고, 외쳐야 한다. 시인의 말처럼 밑 빠진 독이기에 더 열심히 물을 부어야 한다. 땅으로 흘러 들어간 물은 거름이 되고 지하수가 되어 초목을 살리는 생명수가 된다. 그것이 곧 천지신명을 감동시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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