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그대 순례 / 고은

샌. 2007. 4. 13. 11:57

좀 느린 걸음걸이면 된다

갑자기 비가 오면

그게 그대 옛 친구야

푹 젖어보아라

 

가는 것만이 아름답다

한 군데서

몇 군데서 살기에는

너무 큰 세상

 

해질녘까지

가고 가거라

그대 단짝

느린 그림자와 함께

흐린 날이면

그것 없이도

그냥 가거라

 

- 그대 순례 / 고은

 

몇 달에 걸쳐 오체투지를 하며 성지를 찾아가는 티베트인들의 순례를 생각한다. 그들의 종교적 열정과 단순성이 부러울 때가 있다. 몇 달씩 생계를 놓아도 그들의 사는 모습은 크게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그런 가난과 자유로움이 도리어 부러울 때가 있다.

 

먹고 사는 일에 매달려 나는 한 번도 나를 찾는 순례에 나서본 적이 없다. 일상의 무거운 짐 벗어버리고 육신을 먹여살릴 개나리봇짐 하나 메고 길 떠나본 적이 없다. 올라가는 일보다 내려가는 일이 더 중요하다고 한다. 채우는 일보다 훌훌 털어내는 일이 더 소중함을 알 것도 같다.

 

인생살이가 순례길과 다르지 않다고 한다. 어찌 보면 도시에서의 삶이 사막길일 수도 있다. 그래서 우리의 일상이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서는 고행의 순례길이 되기도 한다. 길 떠나기를 두려워하는 자, 한낮의 따가운 햇살이나 매서운 모래바람을 두려워하는 자는 편안한 오아시스에 머물 것이다. 그러나 저 불모의 사막을 향해 길 떠나는 순례자의 발걸음은 아름답다. 가는 것만이 아름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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