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자비 / 이경

샌. 2007. 3. 29. 09:08

잘 썩어 부드러운 흙에 골을 내어

눈이 빨간 무씨를 넣고

재를 지내는 마음으로 흙을 덮는다

까치가 쏘물다고 잔소리를 한다

우리가 가고 나면 내려와 솎아먹을 것이다

씨를 묻고 내려온 뒷날 밤

마침맞게 천둥번개 치고 봄비 내린다

이건 썩 잘 된 일이다

봄비가 씨앗 든 밭을 측은측은 적시는 일만큼

크고 넉넉한 자비를 본 적이 없다

모종을 얻은 밭의 기쁨이나

밭을 얻은 모종의 기뿜이 막상막하다

심어놓고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저만치 물러서야 한다

 

- 자비 / 이경

 

이 시를 읽으면 농사는 성스러운 제의(祭儀)와 같다. 지금은 헛간에나 쳐박혀 있을 '農者天下之大本'이라는 말이 새삼 눈물겹게 다가온다. 근원적 의미에서 이런 농사를 짓는 농부는 이젠 시골에서도 만나기 힘들다.

 

올해는 흙을 밟을 일도 없게 생겼다. 뿌리가 잘려나간 것처럼 허전하고 무력해지는 일이다. 나도 죽기 전에저런 농사 한 번 지어봤으면 좋겠다. 사제가하늘에 제사를 드리는 간절한 심정으로 그렇게 땅과 만나고 싶다. 그때의 논과 밭은 그분과 직접 만나는 제단이 되고 자비의 터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일이 아무에게나 찾아오는 축복이 아님을안다. 마음을 비우고 저만치 물러설 줄 아는 사람이라야 그런 자비의 마당에 초대받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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