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재춘이 엄마 / 윤제림

샌. 2007. 5. 8. 12:42

재춘이 엄마가 이 바닷가에 조개구이집을 낼 때

생각이 모자라서, 그보다 더 멋진 이름이 없어서

그냥 '재춘이네'라는 간판을 단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뿐이 아니다

보아라, 저

갑수네, 병섭이네, 상규네, 병호네

 

재춘이 엄마가 저 간월암(看月庵)같은 절에 가서

기왓장에 이름을 쓸 때

생각나는 이름이 재춘이밖에 없어서

'김재춘'이라고만 써놓고 오는 것은 아니다

재춘이 엄마만 그러는 게 아니다

가서 보아라, 갑수 엄마가 쓴 최갑수, 병섭이 엄마가 쓴 서병섭,

상규 엄마가 쓴 김상규, 병호 엄마가 쓴 엄병호

 

재춘아, 공부 잘 해라!

 

- 재춘이 엄마 / 윤제림

 

오늘은 어버이날이다. 모든 어머니의 마음은 재춘이 엄마와 다르지 않으리라. 하늘이 내려준 자식 사랑의 모성애를 누가 폄하할 수 있으랴. 그러나 모진 현실은 우리의 어머니들 조차 극악스럽게 만들고 있다. 이 시대의 현명한 어머니들은 어떻게 해야 사랑하는 자식이 도태되지 않고 살아남을 수 있는지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말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남에게 자신의 의중을 쉽고 재미있게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은 크나큰 자질이며 미덕이다. 사람들을 재미있게 감동시키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주변의 흔히 보는 일에서 이렇게 재미있는 시를 만든 시인의 재주가 놀랍다.

이왕에 재미있는 시를 하나 더 읽어본다. 우리가 아직도 이런 순박한 시골 아낙네들과 같은 시대에 살고 있다는 사실이 다행으로 생각된다.

 

예순 넘어 한글 배운 수문댁

몇 날 지나자 도로 표지판은 제법 읽었는데

 

자응 자응 했던 것을

장흥 장흥 읽게 되고

과냥 과냥 했던 것을

광양 광양 하게 되고

광주 광주 서울 서울

다 읽게 됐는데

 

새로 읽게 된 말이랑 이제껏 썼던 말이랑 통 달라서

말 따로 생각 따로 머릿속이 짜글짜글 했는데

 

자식 놈 전화 받을 때도

옴마 옴마 그래부렀냐? 하다가도

부렀다와 버렸다 사이에서

가새와 가위 사이에서

혀와 쎄가 엉켜서 말이 굳곤 하였는데

 

어느 날 변소 벽에 써진 말

수문 양반 왕자지

그 말 하나는 옳게 들어왔는데

 

그 낙서를 본 수문댁

입이 눈꼬리로 오르며

그람 그람 우리 수문 양반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왕자거튼 사람이었제

 

- 수문 양반 왕자지 / 이대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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