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그날 / 정민경

샌. 2007. 5. 18. 08:58

나가 자전거 끌고잉 출근허고 있었시야

근디 갑재기 어떤 놈이 떡 하니 뒤에 올라 타블더라고. 난 뉘요 혔더니, 고 어린 놈이 같이 좀 갑시다 허잖어. 가잔께 갔재. 가다본께 누가 뒤에서 자꾸 부르는 거 같어. 그랴서 멈췄재. 근디 내 뒤에 고놈이 갑시다 갑시다 그라데. 아까부텀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놈이 어른한티 말을 놓는거이 우째 생겨먹은 놈인가 볼라고 뒤엘 봤시야. 근디 눈물 반 콧물 반 된 고놈 얼굴보담도 저짝에 총구녕이 먼저 뵈데.

총구녕이 점점 가까이와. 아따 지금 생각혀도..... 그땐 참말 오줌 지릴 뻔 했시야. 그때 나가 떤건지 나 옷자락 붙든 고놈이 떤건지 암튼 겁나 떨려불데. 고놈이 목이 다 쇠갔고 갑시다 갑시다 그라는데잉 발이 안떨어져브냐. 총구녕이 날 쿡 찔러. 무슨 관계요? 하는디 말이 안나와. 근디 내 뒤에 고놈이 얼굴이 허어애 갔고서는 우리 사촌 형님이오 허드랑께. 아깐 떨어지도 않던 나 입에서 아니오 요 말이 떡 나오데.

고놈은 총구녕이 델꼬가고, 난 뒤도 안돌아보고 허벌나게 달렸쟤. 심장이 쿵쾅쿵쾅 허더라고. 저 짝 언덕까정 달려 가 그쟈서 뒤를 본께 아까 고놈이 교복을 입고있데. 어린 놈이....

그라고 보내놓고 나가 테레비도 안보고야, 라디오도 안틀었시야. 근디 맨날 매칠이 지나도 누가 자꼬 뒤에서 갑시다 갑시다 해브냐.

아직꺼정 고놈 뒷모습이 그라고 아른거린다잉.....

- 그날 / 정민경

오늘만 돌아오면 부끄럽다. 그 당시와 그 이후로도 나는 광주에서 일어난 비극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 내 시대 인식은 당시 군부가 발표한 내용 쪽을 더 신뢰했다. 광주의 아픔을 피상적으로나마 이해하게 된 건 한참이 지나서였다.

5.18 묘역도 올해에 처음으로 참배했다. 300여기의 무덤 앞에서 도대체 이런 만행이 이 나라에서 자행되었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 무덤 한 기 한 기마다 얼마나 가슴 아픈 사연들이 있었겠는가. 불의에 저항하다 화려하게 산화한 넋도 있을 것이고, 정말 어처구니없이 억울하게 일을 당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그리고 동원된 진압 군인들도 희생자들인 것은 마찬가지다. 한 사람의 권력욕 앞에서 이 땅은 너무나 많은 피를 흘려야 했다.

이 시는 5.18 민중항쟁 기념 청소년 백일장에서 뽑힌 올해의 대상 작품이다. 놀랍게도 서울에 있는 한 여고생이 쓴 것이라고 한다. 그날 광주에는 영웅들만 있었던 건 아니다. 자전거에 탄 소시민의 두려움이 그날의 공포를 잘 나타내고 있다. 그리고 그날의 비극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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