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너 / 피천득

샌. 2007. 5. 27. 08:42

눈보라 헤치며

날아와

눈 쌓이는 가지에

나래를 털고

그저 얼마 동안

앉아있다가

깃털 하나

아니 떨구고

아득한 눈 속으로

사라져 가는

- 너 / 피천득

권정생 선생님에 이어 며칠 사이로 피천득 선생님마저 타계하셨다. 아흔여섯 긴 세월 동안 천진난만한 동심을 잃지 않고 살아가신 선생님의 생애는 그 자체가 한 편의 단아한 수필로 보인다. 선생님의 글을 처음 접한 것은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온 '수필'이라는 글이었다. '수필은 청자 연적이다. 수필은 난이요, 학이요, 청초하고 몸맵시 날렵한 여인이다. 수필은 그 여인이 숲 속으로 난 고요한 길이다.' 이미 40년 전이지만 교과서에 실렸던 청자 연적의 사진 한 장까지 기억이 난다. 연적을 장식한꽃잎 하나가 어긋나 있었는데 바로 그 파격의 맛이 수필이라고 설명해 주었던 국어 선생님의 말까지 생생하다.

선생님의 글에서는동양적인 관조의 분위기가 물씬 풍긴다. 그것은 선생님이 가장 아끼셨다는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다. 너와 나의인연 또한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너는 어느 순간내 옆에 나래를 털고 앉았다가 이내흔적도 없이 사라져간다. 그러나 네가 눈보라 헤치며찾아온 그 비밀을난 알지 못한다. 다만 이것만은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다.사라진 것은 다만 눈에 보이지 않게 되었을 뿐이라는 것, 그리고 네가 찾아온 짧은 순간이 나에게는기쁨과 행복이었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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