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기도 / 서정주

샌. 2007. 6. 2. 10:52

저는 시방

꼭 텡 비인 항아리 같기도 하고

또 텡 비인 들녘 같기도 합니다

주여 (이렇게밖엔 당신을 부를 길이 없습니다)

한동안 더 모진 광풍을

제 안에 두시든지

몇 마리의 나비를 주시든지

반쯤 물이 담긴 도자기와 같이하시든지

뜻대로 하옵소서

시방 제 속은

많은 꽃과 향기들이

담겼다가 비워진 항아리와 같습니다

 

- 기도 / 서정주

 

내 옆 동료는 미당을 비아냥거르듯 늘 말당이라고 부른다. 그의 친일 행적만 아니라 그 뒤에도 정권에 빌붙는 처신 때문이다. 시에서 감동을 받더라도 시인의 실제 모습을 알고나면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말 따로 사람 따로인 경우가 많지만 그것이 시인에 해당될 때는 더욱 실망하게 된다. 시인이란 아름다운 시를 쓰는 사람이 아니라 시처럼 아름답게 삶을 사는 사람이어야 한다는 의식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어쨌든 이 시는 참 좋다. 그분 앞에 놓여진 빈 항아리가 되는 것이야말로 모든 종교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저는 시방 텡 비인 항아리 같다는 고백은 사실 나에게는 너무 먼 얘기고 부러운 말이다. 나는 지금무언가로가득 채워져있어 그분이 들어올 여지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기도란 무엇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다. 나를 당신의 뜻대로 하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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