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0

솔직히 말해서 나는 / 김남주

솔직히 말해서 나는 아무것도 아닌지 몰라 단 한방에 떨어지고 마는 모기인지도 몰라 파리인지도 몰라 뱅글뱅글 돌다 스러지고 마는 그 목숨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나는 가련한 놈 그 신세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꽃잎인지도 몰라라 꽃잎인지도 피기가 무섭게 싹둑 잘리고 바람에 맞아 갈라지고 터지고 피투성이로 문드러진 꽃잎인지도 몰라라 기어코 기다려 봄을 기다려 피어나고야 말 꽃인지도 몰라라 그래 솔직히 말해서 나는 별 것이 아닌지 몰라 열 개나 되는 발가락으로 열 개나 되는 손가락으로 날뛰고 허우적거리다 허구헌 날 술병과 함께 쓰러지고 마는 그 주정인지도 몰라 누군가 말하듯 병신 같은 놈 그 투정인지도 몰라 아 그러나 그러나 나는 강물인지도 몰라라 강물인지도 눈물로 눈물로 눈물로 출렁이는 강물인지도..

시읽는기쁨 2008.08.18

하늘공장 / 임성용

저 맑은 하늘에 공장 하나 세워야겠다 따뜻한 밥솥처럼 해가 뜨고 해가 지는 곳 무럭무럭 아이들이 자라고 웃음방울 영그는 곳 그곳에서 연기 나는 굴뚝도 없애고 철탑도 없애고 손과 발을 잡아먹는 기계 옆에 순한 양을 놓아 먹이고 고공농성의 눈물마저 새의 날갯짓에 실어 보내야겠다 저 펄럭이는 것들, 나뒹구는 것들, 피 흐르는 것들 하늘공장에서는 구름다리 위에 무지개로 필 것이다 삶은 고통일지라, 죽어도 추억이 되지 못하는 고통을 하늘공장의 예배당에서는 찬양하지 않을 것이다 힘없이 잘린 모가지를 껴안고 천천히 해찰하며 내일이라도 당장 하늘공장으로 출근을 해야겠다 큰 공장 작은 공장 모두 하나의 문으로 통하는 하늘공장에 가서, 저 푸른 하늘공장에 가서 부러진 손과 발을 쓰다듬고 즐겁게 일해야겠다 땀내 나는 향기를..

시읽는기쁨 2008.08.15

옛날의 그 집 / 박경리

비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쑥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살았다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 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늘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

시읽는기쁨 2008.08.08

사이 / 박덕규

사람들 사이에 사이가 있었다 그 사이에 있고 싶었다 양편에서 돌이 날아왔다 - 사이 / 박덕규 흔히 부부를 일심동체라고 하는데 어떻게 보면 참 무지막지한 말이다. 두 인격체가 같은 마음, 한 몸이 된다는 것은 기계나 로봇이 아니고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일심동체가 꼭 이상적 관계만도 아니다. 한자로 '人間'은 '사람 사이'라는 뜻이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당연히 사이가 있어야 한다. 그 사이로 바람이 지나고 물소리가 들려야 한다. 사람 살기의 어려움은 결국 '사이', 즉 관계를 어떻게 맺느냐에 달려 있다. 시인이 말하는 '사이에 있기'는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이쪽 저쪽 편가르기를 하는 세상의 견해에 매몰되지 않고 자신을 지켜나가는 삶을 말하는 것일까? 세상의 비웃음이나 돌팔매 쯤 무시해 버릴 ..

시읽는기쁨 2008.08.05

꽃게 이야기 / 김선태

흔히 보름 게는 개도 안 먹는다는 속설이 있지요. 왜냐구요? 이놈들은 주로 보름 물때에 탈피를 하느라 아무 것도 먹지 못하기 때문이지요. 하여, 겉은 번지르르 해도 속은 텅 비어 있으니 그야말로 무장공자無腸公子라는 말씀이지요. 허나, 서해 어느 갯마을에는 이 속설을 살짝 뒤집은 재미난 이야기도 전해 내려오지요. 보름달이 뜨면 괜시리 시골 처녀들이 밤마실을 나가듯 야행성 꽃게들도 먹이 활동을 나간다지요. 그런데 달빛이 하도나 밝아 물속까지 훤히 비추면서 꽃게들도 그림자를 드리우니, 아 글쎄 제 그림자인 줄을 모르는 이놈들은 등 뒤의 무슨 시커먼 물체에 화들짝 놀라 삼십육계 게걸음을 친다는 겁니다. 한참을 쫓기다 이젠 안 따라오겠지 하고 돌아보면 따라오고 잠시 바위틈에 숨었다가 나가도 다시 따라오니 참 그만..

시읽는기쁨 2008.07.26

벌레 / 고미경

나는 뼈가 없는 동물입니다 먼 조상이 뼈와 엿을 바꿔먹었다고도 하고 잘못된 사랑으로 벌을 받아 유전된 것이라고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뼈대 없는 가문에다 역사도 없고 사상도 없다며 나를 천하다고 말합니다 손가락질까지 합니다 그런데 말이죠 뼈가 없으니 생각이 없어 좋을 때도 있습니다 생각이 없으니 번뇌도 없습니다 번뇌가 없으니 싸울 일도 없습니다 뼈는 무기입니다 뼈는 칼날입니다 뼈는 주먹입니다 뼈는 증오입니다 나는 뼈가 없어 비무장지대입니다 아니 꽃잎입니다 입술입니다 젖무덤입니다 온몸으로 기어가는 바닥이 나의 하늘입니다 함부로 침 뱉지 마십시오 - 벌레 / 고미경 이제까지는 뼈와 주먹과 칼의 문화가 세상을 지배했다. 약하고 힘 없고 부드러운 것들은 뒷전으로 밀려나서 벌레 취급을 받았다. 그러나 이제 세상을 ..

시읽는기쁨 2008.07.22

청춘 / 사무엘 울만

청춘이란 인생의 어느 한 기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상태를 말한다. 그것은 장미빛 뺨, 앵두 같은 입술, 하늘거리는 자태가 아니라 강인한 의지, 풍부한 상상력, 불타는 열정을 말한다. 청춘이란 인생의 깊은 샘물에서 오는 신선한 정신, 유약함을 물리치는 용기, 안이를 뿌리치는 모험심을 의미한다. 때로는 이십의 청년보다 육십이 된 사람에게 청춘이 있다. 나이를 먹는다고 해서 우리가 늙는 것이 아니다. 이상을 잃어버릴 때 비로소 늙는 것이다. 세월은 우리의 주름살을 늘게 하지만 열정을 가진 마음을 시들게 하지는 못한다. 고뇌, 공포, 실망 때문에 기력이 땅으로 들어갈 때, 비로소 마음이 시들어 버리는 것이다. 육십세이든 십육세이든 모든 사람의 가슴 속에는 놀라움에 끌리는 마음, 젖먹이 아이와 같은 미지..

시읽는기쁨 2008.07.18

그녀네 집이 멀어서 / 신경림

그녀네 집이 멀어서 북적대는 시게전을 지나야 한다 골목을 벗어나면 언덕이 있고 싸리울 하얀 꽃 속에 그녀는 산다 방은 늘 비어 있어 어른대는 살구꽃에 취해 잠이 들었다 눈을 뜨면 꽃 그림자가 방문을 덮는다 그녀네 집이 멀어서 물 머금은 보름달을 등에 지고 내려오는 길은 더욱 멀다 골목을 벗어나고 시게전을 지나서 외진 모퉁이 들여다보면 꼬치집에도 그녀는 없다 기다리며 구석에 앉아 술을 마시다가 갑자기 나는 잊는다 그녀의 얼굴을 체취를 잊고 이름을 잊는다 그녀네 집이 멀어서 시게전을 잊고 유행가가 자욱한 골목을 잊고 싸리울 하얀 빈 방을 잊고 비릿한 이불자락을 잊고 달빛을 가리는 살구꽃과 과묵한 꼬치집 주인을 잊고.... 당초부터 이 세상에 없는지도 모를 그녀네 집이 멀어서 너무 멀어서 - 그녀네 집이 멀어..

시읽는기쁨 2008.07.14

참 좋은 당신 / 김용택

어느 봄날 당신의 사랑으로 응달지던 내 뒤란에 햇빛이 들이치는 기쁨을 나는 보았습니다 어둠 속에서 사랑의 불가로 나를 가만히 불러내신 당신은 어둠을 건너온 자만이 만들 수 있는 밝고 환한 빛으로 내 앞에 서서 들꽃처럼 깨끗하게 웃었지요 아 생각만 해도 참 좋은 당신 - 참 좋은 당신 / 김용택 오늘은 좋은 당신에게 이 시를 보냅니다. 어느 날 고운 미소로 다가온 당신은 이제 내 마음 속에 꽃으로 피었습니다. 당신이 가까이 있거나 멀리 있거나 당신의 향기는 내 주위를 감싸돌며 늘 나를 취하게 합니다. 당신은 그렇게 내 속에 살아 있습니다. 아, 당신은 생각만 해도 참 좋은 사람입니다.

시읽는기쁨 2008.07.08

거대한 뿌리 / 김수영

나는 아직도 앉는 법을 모른다 어쩌다 셋이서 술을 마신다 둘은 한 발을 무릎 위에 얹고 도사리지 않는다 나는 어느새 南쪽식으로 도사리고 앉았다 그럴 때는 이 둘은 반드시 以北 친구들이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앉음새를 고친다 八一五 후에 김병욱이란 詩人은 두 발을 뒤로 꼬고 언제나 일본여자처럼 앉아서 변론을 일삼았지만 그는 일본대학에 다니면서 四年 동안을 제철회사에서 노동을 한 强者다 나는 이사벨 버드 비숍女史와 연애하고 있다 그녀는 1893년 조선을 처음 방문한 英國王立地學協會 會員이다 그녀는 인경전의 종소리가 울리면 장안의 남자들이 모조리 사라지고 갑자기 부녀자의 世界로 화하는 劇的인 서울을 보았다 이 아름다운 시간에는 남자로서 거리를 無斷通行할 수 있는 것은 교군꾼, 내시, 外國人의 종놈, 官吏들뿐이었다..

시읽는기쁨 2008.07.03

오리 망아지 토끼 / 백석

오리치를 놓으려 아배는 논으로 내려간지 오래다 오리는 동비탈에 그림자를 떨어트리며 날아가고 나는 동말랭이에서 강아지처럼 아배를 부르며 울다가 시악이 나서는 등뒤 개울물에 아배의 신짝과 버선목과 대님오리를 모다 던져 버린다 장날 아침에 앞 행길로 엄지 따라 지나가는 망아지를 내라고 나는 조르면 아배는 행길을 향해서 크다란 소리로 - 매지야 오나라 - 매지야 오나라 새하려 가는 아배의 지게에 지워 나는 산으로 가며 토끼를 잡으리라고 생각한다 맞구멍난 토끼굴을 아배와 내가 막어서면 언제나 토끼 새끼는 내 다리 아래로 달아났다 나는 서글퍼서 울상을 한다 - 오리 망아지 토끼 / 백석 이 시를 읽으면 가슴이 따스해진다. 내게도 이런 동화 같은 시절이 있었으리라. 할배 등에 올라타서 할배 수염을 잡고 "이랴 이랴"..

시읽는기쁨 2008.06.27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 이현주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바람으로 피었다가 바람으로 지리라 누가 일부러 다가와 허리 굽혀 향기를 맡아준다면 고맙고 황혼의 어두운 산그늘만이 찾아오는 유일한 손님이어도 또한 고맙다 홀로 있으면 향기는 더욱 맵고 외로움으로 꽃잎은 더욱 곱다 하늘 아래 있어 새벽이슬 받고 땅의 심장에 뿌리박아 숨을 쉬니 다시 더 무엇을 기다리랴 있는 것 가지고 남김없이 꽃 피우고 불어가는 바람 편에 말을 전하리라 빈들에 꽃이 피는 것은 보아 주는 이 없어도 넉넉하게 피는 것은 한 평생 홀로 견딘 그 아픔의 비밀로 미련 없는 까만 씨앗 하나 남기려 함이라고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피었다가 지리라 끝내 이름 없는 들꽃으로 지리라 - 한 송이 이름 없는 들꽃으로 / 이현주 내가 기독교를 받아들이고 나름대로..

시읽는기쁨 2008.06.23

비는 내리는데 / 조병화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비에 막혀 그대로 어둠이 되는 미도파 앞을 비는 내리는데 서울 시민들의 머리 위를 비는 내리는데 비에 젖은 그리운 얼굴들이 서울의 추녀 아래로 비를 멈추는데 진종일을 후줄근히 내 마음은 젖어내리는데 넓은 유리창으로 층층이 비는 흘러내리는데 아스팔트로 네거리로 빗물이 흘러내리는데 그대로 발들을 멈춘 채 밤은 내리는데 내 마음 속으로 내 마음 흘러내리는 마음 내 마음 밖으로 내 마음 흘러내리는 마음 사랑하는 사람을 막고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가난한 방에 가난한 침대 위에 가난한 시인의 애인아.... 어두운 창을 닫고 쓸쓸한 인생을 그대로 비는 내리는데 아무런 기쁨도 없이 하는 일 없이 하루를 보내는데 하루가 오고 진종일을 비는 내리는데 비에 막혀 미도파 앞에 발을 멈춘 채 내 마음에..

시읽는기쁨 2008.06.18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밀어올린 꽃줄기 끝에서 그대가 피는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떨리는지 그대가 피어 그대 몸속으로 꽃벌 한 마리 날아든 것인데 왜 내가 이다지도 아득한지 왜 내 몸이 이리도 뜨거운지 그대가 꽃피는 것이 처음부터 내 일이었다는 듯이 - 내 몸속에 잠든 이 누구신가 / 김선우 그대가 내 안으로 들어와서 꽃을 피웁니다. 그대가 떨리고 뜨거운 만큼, 나 역시 떨리고 뜨겁습니다. 그대는 내 안에서 꽃만 피우는 것이 아닙니다. 저 하늘의 별을 내 안에서 반짝이게 하고, 서쪽에서 바람을 불러오고, 찰랑거리며 강물을 흐르게 합니다. 그대는 고운 빛과 맑은 소리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주의 모든 존재가 그대를 따라 내 안에 들어옵니다. 아, 그러고 보니우리 모두는 한 몸입니다. 그대가 꽃 피는 것이 곧 내 일에 다름..

시읽는기쁨 2008.06.17

묻는다 / 휴틴

땅에게 묻는다 : 땅은 땅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존경하지. 물에게 묻는다 : 물은 물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채워주지. 풀에게 묻는다 : 풀은 풀과 어떻게 사는가? 우리는 서로 짜여들며 지평선을 만들지. 사람에게 묻는다 :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사는가? 사람에게 묻는다 :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사는가? 사람에게 묻는다 : 사람은 사람과 어떻게 사는가? - 묻는다 / 휴틴 휴틴은 현재 하노이에 살고 있는 베트남 시인이라고 한다. 월남전에 참전하기도 했다는데, 이념의 차이로 서로를 죽이는 전쟁의 경험이 시에 그대로 반영되고 있다. 인간이 만물의 영장이라지만 사는 모습을 보면 만물 중에서도 가장 어리석지 않은가. 인간만큼 욕심 많고 그래서 만족할 줄 모르는 존재도 없는 것 같다. 욕심 뿐만이 ..

시읽는기쁨 2008.06.11

다시 떠나는 그대 / 김광규

그래도 그대는 떠난다 다시는 돌아올 수 없을 것처럼 집안 단속을 하고 문을 잠갔나 확인하고 손때 묻은 세간살이 가득 찬 정든 집을 등 뒤로남겨놓은 채 손가방만 하나 들고 결연히 떠나서 새 집을 찾는다 언젠가 그 집을 가득 채우고 다시 비어놓은 채 뒤돌아보며 집을 떠날 그대여 몇 번이고 망설이며 떠났다가 소리없이 돌아와 혼자서 다시 떠나는 그대여 - 다시 떠나는 그대 / 김광규 다시 떠난다. 인생이란 늘 새 짐을 꾸리고 길을 떠나는 것. 우리는 길 위에 선 나그네들이다. 돌아오기 위해서 새로운 길 위에 선다. 다시 떠나기 위해서 집을 가득 채운다. 그러나 어찌 망설임이 없으랴. 안온한 항구의 품에 대한 미련이 없으랴. 안개에 덮인 저 길의 끝에는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까? 과연 그 무엇이 있는 것이나 하는 ..

시읽는기쁨 2008.06.03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 심보선

우리에게 그 어떤 명예가 남았는가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몇 개나 남았는가 기억하는가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주말의 동물원은 문전성시 야광처럼 빛나던 코끼리와 낙타의 더딘 행진과 시간의 빠른 진행 팔 끝에 주먹이라는 결실이 맺히던 뇌성벽력처럼 터지던 잔기침의 시절 우리가 소년 소녀였을 때 곁눈질로 서로의 반쪽을 탐하던 꽃그늘에 연모지정을 절이던 바보,라 부르면 바보,라 화답하던 때 기억하는가 기억한다면 소리 내어 웃어 보시게 입천장에 박힌 황금빛 뿔을 쑥 뽑아 보시게 그것은 오랜 침묵이 만든 두 번째 혀 그러니 잘 아시겠지 그 웃음, 소리는 크지만 냄새는 무척 나쁘다는 걸 우리는 썩은 시간의 아들 딸들 우리에겐 그 어떤 명예도 남아 있지 않다 그림자 속의 검은 매듭들 죄다 풀리고야 말았다 - 우리가 ..

시읽는기쁨 2008.05.31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죽은 꽃나무를 뽑아낸 일뿐인데 그리고 꽃나무가 있던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목이 말라 사이다를 한 컵 마시고는 다시 그 자리를 바라본 일뿐인데 잘못 꾼 꿈이 있었나? 인젠 꽃이름도 잘 생각나지 않는 잔상(殘像)들 지나가는 바람이 잠시 손금을 펴보던 모습이었을 뿐인데 인제는 다시 안 올 길이었긴 하여도 그런 길이었긴 하여도 이런 날은 아픔이 낫는 것도 섭섭하겠네 - 왼쪽 가슴 아래께에 온 통증 / 장석남 마음의 통증에는 주소가 없다. 어떨 때는 아무 이유도 없이 찾아온다. 원인을 모르는 신체의 병처럼, 이유도 없이 찾아오는 정체 모를 통증은 두렵고 아프다. 지나간 사랑이든, 그 무엇이든, 모든 통증의 배후에는 그리움이 숨어 있다. 이루지 못한, 그냥 흘러보낸, 또는 아쉬움 같은 것, 그런 것들이 통증의 뒤..

시읽는기쁨 2008.05.27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장석남

누구나 혼자 있을 때는 돈 걱정 여자 걱정 같은 거나 좀 면하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 같은 것이나 생각해 보면 좋다 그 못물이 못자리 한 바퀴 빙 돌아 새로 한 논둑에 생긴 손자국 발자국 앞에 슬몃 머무는 것 생각해 보면 좋다 그것도 아니면 못자리에 들어가는 그 못물의 소리를 하루 중 가장 중요한 시간 가운데다 앉혀보는 것은 어떤가 그 소리로써 잠자리의 곁을 삼아보는 것은 어떤가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하루나 이틀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아니, 여러 날씩 살아보는 것은 어떤가 - 못자리에 들어가는 못물처럼 / 장석남 고향집의 어머니는 며칠 전에 모내기를 하셨단다.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색깔은 모판에 있는 여린 벗잎의 색이고, 가장 아름다운 소리는 마른 논에 물 들어가는 소리라고 했다. 물이 찰랑..

시읽는기쁨 2008.05.23

깨끗한 식사 / 김선우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년 전이나 만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식을 할 때나 육식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내는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언가 공급하기 위해 ..

시읽는기쁨 2008.05.19

솟구쳐 오르기 / 김승희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날게 하지 않으면 상처의 용수철 그것이 우리를 솟구쳐 오르게 하지 않으면 파란 싹이 검은 땅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나 무섭도록 붉은 황토밭 속에서 파아란 보리가 씩씩하게 솟아올라 봄바람에 출렁출렁 흔들리는 것이나 힘없는 개구리가 바위 밑에서 자그만 폭약처럼 튀어나가는 것이나 빨간 넝쿨장미가 아파아파 가시를 딛고 불타는 듯한 담벼락을 기어 올라가는 것이나 민들레가 엉엉 울며 시멘트 조각을 밀어내는 것이나 검은 나뭇가지 어느새 봄이 와 그렁그렁 눈물 같은 녹색의 바다를 일으키는 것이나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삶은 무게에 짓뭉그러진 나비알 상처의 용수철이 없다면 존재는 무서운 사과 한 알의 원죄의 감금일 뿐 죄와 벌의 화농일 뿐 - 솟구쳐 오르기 / 김승희 봄은 영어로 Spring, ..

시읽는기쁨 2008.05.14

가지가 담을 넘을 때 / 정끝별

이를테면 수양의 늘어진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그건 수양 가지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얼굴 한 번 못 마주친 애먼 뿌리와 잠시 살 붙였다 적막히 손을 터는 꽃과 잎이 혼연일체 믿어주지 않았다면 가지 혼자서는 한없이 떨기만 했을 것이다 한 닷새 내리고 내리던 고집 센 비가 아니었으면 밤새 정분만 쌓던 도리 없는 폭설이 아니었으면 담을 넘는다는 게 가지에게는 그리 신명 나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무엇보다 가지의 마음을 머뭇 세우고 담 밖을 가둬두는 저 금단의 담이 아니었으면 담의 몸을 가로지르고 담의 정수리를 타 넘어 담을 열 수 있다는 걸 수양의 늘어진 가지는 꿈도 꾸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목련 가지라든가 감나무 가지라든가 줄장미 가지라든가 담쟁이 줄기라든가 가지가 담을 넘을 때 가지에게 담은 무명에 ..

시읽는기쁨 2008.05.09

윤사월 / 박목월

송화가루 날리는 외딴 봉우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 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 대고 엿듣고 있다 - 윤사월 / 박목월 아마 이맘 때였을 것이다. 동두천 산골에서 군대생활을 할 때였는데 창문을 열어놓은 사무실 책상 위에는 한두 시간만 지나면 노랗게 송화가루가 쌓였다. 그 연노란 병아리 색깔의 송화가루가 고단했던 군대생활과 대비되어 무척 슬프게 보였던 기억이 난다. 그때도 아마 이 시가 떠올랐을 것이다. 군대 막사가 아니었더라면 무척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눈먼 처녀'에서 눈이 멀었다는 것과 처녀라는 것은 인간의 순수성을 표상하는 의미가 아닐까. 세상에 대하여 눈이 멀고, 욕망의 때가 묻지 않은 순수한 인간은 존재 자체가 자연의 일부분이다. 이 시는 적막한 봄날의 슬픈 풍경이 아니라 인간..

시읽는기쁨 2008.05.08

도화 아래 잠들다 / 김선우

동쪽 바다 가는 길 도화 만발했길래 과수원에 들어 색(色)을 탐했네 온 마음 모아 색을 쓰는 도화 어여쁘니 요절을 꿈꾸던 내 청춘이 갔음을 아네 가담하지 않아도 무거워지는 죄가 있다는 것은 얼마나 온당한가 이 봄에도이 별엔 분분한 포화, 바람에 실려 송화처럼 진창을 떠다니고 나는 바다로 가는 길을 물으며 길을 잃고 싶었으나 절정을 향한 꽃들의 노동, 이토록 무욕한 꽃의 투쟁이 안으로 닫아건 내 상처를 짓무르게 하였네 전 생애을 걸고 끝끝내 아름다움을 욕망한 늙은 복숭아나무 기어이 피워낸 몇 날 도화 아래 묘혈을 파고 눕네 사모하던 이의 말씀을 단 한 번 대면하기 위해 일생토록 나무 없는 사막에 물 뿌린 이도 있었으니 내 온몸의 구덩이로 떨어지는 꽃잎 받으며 그대여 내 상처는 아무래도 덧나야겠네 덧나서 물..

시읽는기쁨 2008.04.30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박정대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박정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자..

시읽는기쁨 2008.04.25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 오는 탓이다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가끔은 외면하고 살아볼 일이다. 그러면 새로운 행복이 다정한 손님처럼 찾아올지도 모른다. 적은 월급도 고마워지고, 오늘 같은 봄날만으로도 그저 마냥 좋아질지 모른다. 살면서 소중하다고 여긴 것들, 이것만은 버릴 수 없다고 날 꽁꽁 묶어두던 것들에 대해서..

시읽는기쁨 2008.04.16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일전에 동료들과의 등산길에서 망우리에 있는 박인환 시인의 묘소에 들렀다. 거기를 지날 때면 늘 시인의 묘를 찾는다는 S 형은 복분자 한 잔을 올리고 예를 갖추었다. 어두웠던 시대의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술병으로 요절한 불행했던 시인 박인환.이 시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대표작이..

시읽는기쁨 2008.04.11

옹달샘 / 엄재국

경북 문경시 산길 깊은 내화리 사과를 주렁주렁 매단 사과나무 한 그루가 명찰을 달고 있는데요 "지나다 목마르면 하나 따 드세요" 까치밥에 사람 밥 얹어 매달아 놓은 주먹만한 물통들 목젖 가득 찰랑대는 물소리 - 옹달샘 / 엄재국 이런 시를 읽으면 마음이 따스해진다. 그리고 부끄러워진다. 이 시에는 내 군더더기 말이 필요 없다. 나도 오늘은 저 산골 과수원 주인의 마음씨에 젖어보고 싶다. 한 순간이나마 차가운 내 가슴을 따스하게 데워보고 싶다.

시읽는기쁨 2008.04.07

개나리 / 송기원

어디엔가 숨어 너도 앓고 있겠지 사방 가득 어지러운 목숨들이 밤새워 노랗게 터쳐나는데 독종(毒種)의 너라도 차마 버틸 수는 없겠지 - 개나리 / 송기원 동료 K가 전 직원에게 이런 꽃시 메신저를 보냈다. '4월입니다. 꽃시 한 편 읽으시며 여유를 되찾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멘트와 함께... 이 봄, 독종들조차 버틸 수 없게 터져나오는 생명의 에너지를 위하여 건배!!....

시읽는기쁨 2008.04.02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우리는 어디로 갔다가 어디서 돌아왔느냐 자기의 꼬리를 물고 뱅뱅 돌았을 뿐이다 대낮보다 찬란한 태양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한다 태양보다 냉철한 뭇별들도 궤도를 이탈하지 못하므로 가는 곳만 가고 아는 것만 알 뿐이다 집도 절도 죽도 밥도 다 떨어져 빈 몸으로 돌아왔을 때 나는 보았다 단 한 번 궤도를 이탈함으로써 두번 다시 궤도에 진입하지 못할지라도 캄캄한 하늘에 획을 긋는 별, 그 똥, 짧지만, 그래도 획을 그을 수 있는, 포기한 자 그래서 이탈한 자가 문득 자유롭다는 것을 - 이탈한 자가 문득 / 김중식 보고 싶지 않은 신문, 조선일보를 요즈음 들어서는 가끔 들쳐보고 있다.'시인 100명이 추천한 애송시 100편'이라는 연재물 때문이다. 오늘 신문에 실린 시가 이것인데, 일독했을 때 문득 정신이 번쩍 드..

시읽는기쁨 2008.03.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