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깨끗한 식사 / 김선우

샌. 2008. 5. 19. 13:20

어떤 이는 눈망울 있는 것들 차마 먹을 수 없어 채식주의자가 되었다는데 내 접시 위의 풀들 깊고 말간 천 개의 눈망울로 빤히 나를쳐다보기 일쑤, 이 고요한 사냥감들에도 핏물 자박거리고 꿈틀거리며 욕망하던 뒤안 있으니 내 앉은 접시나 그들 앉은 접시나 매일반, 천년 전이나 만년 전이나 생식을 할 때나 화식을 할 때나 육식이나 채식이나 매일반.

문제는 내가 떨림을 잃어간다는 것인데, 일테면 만년 전의 내 할아버지가 알락꼬리암사슴의 목을 돌도끼로 내려치기 전, 두렵고 고마운 마음으로 올리던 기도가 지금 내게 없고 (시장에도 없고) 내 할머니들이 돌칼로 어린 죽순 밑둥을 끊어내는 순간, 고맙고 미안해하던 마음의 떨림이 없고 (상품과 화폐만 있고) 사뭇 괴로운 포즈만 남았다는 것.

내 몸에 무언가 공급하기 위해 나 아닌 것의 숨을 끊을 때 머리 가죽부터 한 터럭 뿌리까지 남김없이 고맙게, 두렵게 잡숫는 법을 잃었으니 이제 참으로 두려운 것은 내 올라앉은 육중한 접시가 언제쯤 깨끗하게 비워질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다는 것. 도대체 이 무거운, 토막 난 몸을 끌고 어디까지!

- 깨끗한 식사 / 김선우

먹는 것이 그 사람을 결정한다는 말이 있다. 무엇을 어떻게 먹느냐가 사람 품격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인격을 만든다는 뜻이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먹는 일만큼 거룩한 일도 없다. 먹는다는 것은 살아있었던 생명의 전신공양을 받는 행위다. 그것은 우리 또한 기꺼이 다른 생명의 먹이로 되어야 한다는 보시행의 가르침이다.

그러나 지금과 같은 풍요 속의많은 먹을거리는 먹는 일 조차 천박하게 만들고 있다. 내 손을 거치지 않고 식탁에 오른 맛있는 먹을거리는 먹는 행위의 엄숙함을 잊게 만들었다. 내 밭에서 씨를 뿌리고 기른 채소였다면, 내 우리에서 새끼를 받아 기른 돼지였다면, 그렇게 올라온 먹을거리라면 아마 조금은 고맙고 미안하게 입으로 가져갈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비닐 하우스에서 사육장에서 내가 보지도 못하는 가운데 길러진 생명들을 지폐 몇 장으로 바꾸어 먹는다. 그들이 어떻게 길러졌는지는 관심이 없다. 오직 맛 있는 것을 찾아 탐욕스럽게 게걸스럽게 먹으면 된다.

시인의 말처럼 이제 우리에게는 떨림이 없다. 고맙고 두렵게 먹는 법을 잃어 버렸다.TV에 소개되는 맛집 프로에서 땀을 삐질삐질 흘리며 식탐을 과시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때마다 썩은 고깃덩이를 갖고 싸우는 하이에나가 떠오른다. AI나 광우병 사태의 본질은 현대인의 식사 윤리와 동떨어진 것이 아니다. 다시 따스하고 깨끗한 식사를 회복하지 못하는 한 문명의 미래는 암담해 보인다.

나 역시 남을 비난하는 이런 사실에 대해 자유롭지 못하다.진심으로 감사하며 기도하며 식사해 본 적이 별로 없다.더구나 두렵고 떨리는 마음에 대해서야 오죽하랴. 다른 무엇보다 먹는 행위의 감성을 되찾고 싶다. 그것이 바로 얼마나 바르게 살고 있는지에 대한 척도가 되지 않을까. 그리고 그 전제조건은 내 땀과 노동으로 먹을거리를 기르는 것이라는 믿음에도 변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