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샌. 2008. 4. 11. 14:25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도

나는

저 유리창 밖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지

 

사랑은 가고 옛날은 남는 것

여름날의 호숫가 가을의 공원

그 벤치 위에

나뭇잎은 떨어지고

나뭇잎은 흙이 되고

나뭇잎에 덮여서

우리들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그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네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세월이 가면 / 박인환

 

일전에 동료들과의 등산길에서 망우리에 있는 박인환 시인의 묘소에 들렀다. 거기를 지날 때면 늘 시인의 묘를 찾는다는 S 형은 복분자 한 잔을 올리고 예를 갖추었다. 어두웠던 시대의 절망을 견디지 못하고 서른을 갓 넘긴 나이에 술병으로 요절한 불행했던 시인 박인환.이 시는 그의 마지막 작품이며 대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묘비에도 이 시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다.

'목마와 숙녀'처럼 이 시에서도 허무와 쓸쓸함이 짙게 배어있다. 지금도 사람들 입에서 애송되는 것은 그런 애상적 분위기가 가슴을 울리기 때문이리라. 이 시는 1956 년의 어느 날, 명동의 허름한 술집에서 시인들이 모여 술을 마시고 있을 때 박인환이 즉석에서 썼다고 한다. 그리고 시인은 사흘 뒤 술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이승을 뜬다. 더욱 마음이 아픈 것은 가난했던 시인의 부인은 그 뒤에 술집 호스티스로 나가 생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사랑이든 무엇이든 이 세상에서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없다. 파뿌리 되도록 계속하자던 사랑의 맹세도 세월과 함께 녹이 슬고 삭아들게 마련이다. 시인이 술로 잊으려 했던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모르지만 지금 시인은 차가운 흙 속에서 말없이 누워있다. 그 앞에 고개 숙인 나그네에게 시인은 무슨 말을 하고 싶을까? 귀로는 들리지 않는 그 말씀을 한 번 들어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