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박정대

샌. 2008. 4. 25. 20:20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나의 가슴에 성호를 긋던 바람도 스치고 지나가면 그뿐

하늘의 구름을 나의 애인이라 부를 순 없어요

맥주를 마시며 고백한 사랑은 텅 빈 맥주잔 속에 갇혀 뒹굴고

깃발 속에 써놓은 사랑은 펄럭이는 깃발 속에서만 유효할 뿐이지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복잡한 거리가 행인을 비우듯

그대는 내 가슴의 한복판을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이었을 뿐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이름들을 사랑이라고 부를 수는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맥주를 마시고 잔디밭을 더럽히며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지요

이 세상에 영원한 애인이란 없어요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이 세상의 애인은 모두가 옛애인이지요 / 박정대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사랑하자던 맹세도 세월과 함께 시들어갑니다. 젊음이 가듯 사랑도 그렇게 스쳐 지나가죠. 세월이 흐르면서 녹슬지 않는 것이 어찌 사랑만일까요. 모든 것은 빨리 혹은 좀더 늦게 떠나갈 뿐이죠. 차갑게 식은 내 가슴도 한때는 그대로 인하여 뜨거웠었고,나를 열정으로 끓게할 당신도 지나간 옛애인일 뿐이죠. 영원한 사랑도, 영원한 애인도 없어요. 사랑은 쓸쓸함이며 덧없음이예요.

 

그러나 사랑이 떠나고, 옛애인이 되어도 기억은 남아요. 사랑하고 있을 때가 쓸쓸하고 외롭듯, 그대가 남긴기억 또한 쓸쓸하고 외롭답니다. 시인은 그런 안타까움을 역설적으로 노래한지 몰라요. 그대를 영원히 잊지 못해서요.그대는 결코 나를 스치고 지나간 무례한 길손만은 아니랍니다. 비록 한 줄기 바람 같은 인연이었을지라도 그 바람은 내 마음 속의 현을 울리고지나갔답니다. 그대는 옛애인이 되어도 그대가 남긴울림은 아직도 나를 흔들고 있죠. 사랑은 그런 것이예요. 그러므로 사랑은 기억의 통로에 버려진 의미없는 이름만은 아니랍니다. 내 영혼에 남겨진 그대의 흔적에서피어나는꽃을 아프게 바라보는 것. 그것은 쓸쓸함과 외로움을 감사하며 받아들이는 일이고, 그것이 곧 나의 사랑이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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