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샌. 2008. 4. 16. 11:21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잠풍 날씨가 너무나 좋은 탓이고

가난한 동무가 새 구두를 신고 지나간 탓이고 언제나 꼭 같은 넥타이를 매고 고운 사람을 사랑하는 탓이다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거리를 걸어가는 것은 또 내 많지 못한 월급이 얼마나 고마운 탓이고

이렇게 젊은 나이로 코밑수염도 길러보는 탓이고 그리고 어느 가난한 집 부엌으로 달재 생선을 진장에 꼿꼿이 지진 것은 맛도 있다는 말이 자꾸 들려 오는 탓이다

 

- 내가 이렇게 외면하고 / 백석

 

가끔은 외면하고 살아볼 일이다. 그러면 새로운 행복이 다정한 손님처럼 찾아올지도 모른다. 적은 월급도 고마워지고, 오늘 같은 봄날만으로도 그저 마냥 좋아질지 모른다.

 

살면서 소중하다고 여긴 것들, 이것만은 버릴 수 없다고 날 꽁꽁 묶어두던 것들에 대해서도 가끔은 외면해 보자. 그러면 나에게도 새로운 눈이 터질지 누가 알겠는가. 모든 순간이 다아 꽃봉오리인 것을 보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세상은 내 열심에 따라 피어날 꽃봉오리인 것을!

 

* 잠풍; 잔잔하게 부는 바람

* 달재;달강어. 쑥지과에 속하는 바닷물고기

* 진장; 진간장. 오래 묵어서 진하게 된 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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