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0

삼류들 / 이재무

삼류는 자신이 삼류인 줄 모른다 삼류는 간택해준 일류에게, 그것을 영예로 알고 기꺼이 자발적 헌신과 복종을 실천한다 내용 없는 완장 차고 설치는 삼류는 알고 보면 지독하게 열등의식을 앓아온 자이다 삼류가 가방끈에 끝없이 유난 떨며 집착하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것이 성희롱인 줄도 모르고 일류가 몸에 대해 던지는 칭찬 곧이곧대로 알아듣고 우쭐대는 삼류 삼류는 모임을 좋아한다 그곳에서 얻을 게 많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일류와 어울려 사진을 박고 일류와 더불어 밥을 먹고 일류와 섞여 농을 주고받으며 스스로 일류가 되어간다고 착각하는 삼류 자신이 소모품인 줄도 모르고 까닭 없이 자만에 빠지는 불쌍한 삼류 사교의 지진아 아 그러나, 껍질 없는 알맹이가 없듯 위대하게 천박한 삼류 없이 어찌 일류의 광휘가 있으랴 노래를..

시읽는기쁨 2009.10.06

개사돈 / 김형수

눈 펑펑 오는 날 겨울 눈 많이 오면 여름 가뭄 든다고 동네 주막에서 술 마시고 떠들다가 늙은이들간에 쌈질이 났습니다 작년 홍수 때 방천 막다 다툰 아랫말 나주 양반하고 윗말 광주 양반하고 둘이 술 먹고 술상 엎어가며 애들처럼 새삼 웃통 벗고 싸우는데 고샅 앞길에서 온 동네 보란 듯이 나주 양반네 수캐 거멍이하고 광주 양반네 암캐 누렁이하고 그 통에 그만 흘레를 붙고 말았습니다 막걸리 잔 세 개에 도가지까지 깨뜨려 뒤꼭지 내몰이에 성질 채운 주모 왈 오사럴 인종들이 사돈간에 먼 쌈질이여 쌈질이 - 개사돈 / 김형수 요사이 느닷없는 개논쟁이 붙었다. A 씨가 신문에 신임 총리를 두둔하며 야권을 비난하는 글을 올리자, B 씨가 노욕과 변절이 불쌍하다는 글을 썼다. 그러자 C 씨가나서서는 B 씨를 향해 '개소..

시읽는기쁨 2009.10.01

아이고 문디야 / 권기호

태백산 돌기로 내려온 지판은 오래전 문경암층 방향 틀어 바람소리 물소리 이곳 음질 되어 영일만 자락까지 퍼져있었다 어메요 주께지 마소 나는 가니더 미친년 주것다 카고 이자뿌소 부푼 배를 안고 부풀게 한 사내 따라 철없는 딸은 손사래치며 떠나는데 아이고 저 문디 우째 살라 카노 아이고 저 문디 우째 살키고 인연의 삼배끈 황토길 놓으며 어메는 목젖 세하게 타고 있었다 호박꽃 벌들 유난스런 유월 느닷없이 남의 살 제 몸에 들어와 노을빛 먹구름 아득히 헤맨 딸에게 어메는 연신 눈물 훔치며 맨살 드러낸 산허리 흙더미 내리듯이 마른 갈대소리 갈대가 받듯이 토담에 바랜 정 골짜기에 쌓을 수밖에 없는데 세월 흘러도 신생대 암층 고생대 지층이 받쳐왔듯이 풍화된 마음 먼 훗날 만나게 되면 아이고 이 문디 우째 안죽고 살았..

시읽는기쁨 2009.09.28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기사양반! 저짝으로 쪼깐 돌아서 갑시다 어칳게 그란다요. 뻐스가 머 택신지 아요? 아따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재 쓰잘데기 읎는 소리하지 마시요 저번착에 기사는 돌아 가듬마는 그 기사가 미쳤능갑소....., 노인네 갈수록 눈이 어둡당께. 저번착에도 내가 모셔다 드렸는디 - 아름다운 위반 / 이대흠 가슴이 따스해지는 시다. 또 귀에 착착 엥기는 전라도 사투리가 시의 맛을 더해준다. '늙은이가 물팍이 애링께 그라재'라는 노인네는 고향에 계신 우리들의 어머님, 아버님이시다. 운전기사는 겉으로는 면박을 주지만 속으로는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고 눈이 어두워가는 노인을 보며 마음 아파한다. 이런 시를 읽으면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지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그걸 '연민'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아파하는 사람이나 ..

시읽는기쁨 2009.09.24

제비 / 최종진

집으로 들어오는 전깃줄 하나 날갯죽지 맞대고 촘촘히 앉아 도무지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이른 아침부터 시부렁거렸지 저새끼좆나게늦잠자네 하는 것 같기도 하고 니기미씨팔니기미씨팔 하는 것 같기도 해서 야야, 오늘은 일요일이야 늦잠 좀 자면 안되겠나 사정도 해쌌는데 그 사이 세월이 얼마나 흘렀다고 흐릿한 눈 비비고 보고 닦고 봐도 텅 빈 전깃줄엔 눈물만 그렁그렁 달려 있어 니 어디 갔노, 안 보이네 어이, 씨팔 제발 다시 돌아와 그때처럼 니기미씨팔니기미씨팔 욕 한번 신나게 해주면 안 되겠나 - 제비 / 최종진 그 많던 제비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시절 제비는 새가 아니라 식구였다. 제비는 꼭 사람 사는 집에다 자기들 집을 지었다. 어느 해는 하필 밥 먹는 자리위에 제비집을 만들어 놓고는 우리들 저녁 먹는 모..

시읽는기쁨 2009.09.19

그녀가 보고 싶다 / 홍해리

크고 동그란 쌍꺼풀의 눈 살짝 가선이 지는 눈가 초롱초롱 빛나는 까만 눈빛 반듯한 이마와 오똑한 콧날 도톰하니 붉은 입술과 잘 익은 볼 단단하고 새하얀 치아 칠흑의 긴 머리결과 두 귀 작은 턱과 가는 허리 탄력 있는 원추형 유방 연한 적색의 유두 긴 목선과 날씬한 다리 언뜻 드러나는 이쁜 배꼽 밝은 빛 감도는 튼실한 엉덩이 주렁주렁 보석 장신구 없으면 어때 홍분 백분 바르지 않은 민낯으로 나풀나풀 가벼운 걸음걸이 깊은 속내 보이지 않는 또깡또깡 단단한 뼈대 건강한 오장육부와 맑은 피부 한번 보면 또 한번 보고 싶은 하박하박하든 차란차란하든 품안에 포옥 안기는 한 편의 詩 - 그녀가 보고 싶다 / 홍해리 마흔 중반에 접어들면서 삶에 대한 의문이 여름 하늘의 뭉게구름처럼 일어났다. 삶은 고단하고 남루했으며,..

시읽는기쁨 2009.09.17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 김재진

믿었던 사람의 등을 보거나 사랑하는 이의 무관심에 다친 마음 펴지지 않을 때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두 번이나 세 번, 아니 그 이상으로 몇 번쯤 더 그렇게 마음속으로 중얼거려 보라 실제로 누구나 혼자이지 않은 사람은 없다 지금 사랑에 빠져 있거나 설령 심지 굳은 누군가 함께 있다 해도 다 허상일 뿐 완전한 반려(伴侶)란 없다 겨울을 뚫고 핀 개나리의 샛노랑이 우리 눈을 끌 듯 한때의 초록이 들판을 물들이듯 그렇듯 순간일 뿐 청춘이 영원하지 않은 것처럼 그 무엇도 완전히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란 없다 함께 한다는 건 이해한다는 말 그러나 누가 나를 온전히 이해할 수 있는가 얼마쯤 쓸쓸하거나 아니면 서러운 마음이 짠 소금물처럼 내밀한 가슴 속살을 저며 놓은다 해도 수긍해야 할 일 어차피 수긍할..

시읽는기쁨 2009.09.15

등짐 / 임보

꿈에서는 그 꿈이 꿈인 줄 모르듯이 우리 사는 이 세상도 아마 그런갑다 꿈에서 얽힌 일들 깨고 나면 다 풀리듯 이 세상 근심 걱정도 깨고 나면 다 풀릴 걸 등짐만 공연히 지고 등이 휘게 가는 갑다 - 등짐 / 임보 살아 생전 고된 날들의 연속이었던 외할머니, 돌아가신 뒤 가장 편안한 얼굴을 보이셨다. 등짐을 내려놓으니 그리 마음 편하셨나 보다. 삶이 버겁고 힘들지 않은 사람 어디 있으랴. 모두들 무거운 등짐 하나씩 지고 사막길을 걸어간다. 그러나 누굴 탓할 수도 없다. 스스로 자청해서 진 등짐이고, 근심 걱정 또한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던가. 그것이 인생이다. 죽어서야 벗어놓을 수 있는 등짐 하나씩 지고 우리는 살아간다.그 안에는 등이 휘어질 듯 무거운 돌맹이가 들어있다. 다들 돌맹이를 황금..

시읽는기쁨 2009.09.10

성병에 걸리다 / 유안진

하느님 저는 투명인간인가 봅니다 바로 앞 바로 옆에 있어도 없는 듯이 여깁니다 불쾌하고 기분 나빠 '있다'고 '나'라고 주장하다가 지쳐 그만 성병(聲病)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로마 제국의 초기 그리스도교도처럼 순교(殉敎)를 영광과 환희로 맞았던 초기 기독교도처럼 명성을 영광과 환희로 맞이하고 싶은데 도저히 정복할 수 없어서 국교(國敎)로 삼아버린 로마제국처럼 제가 정복할 수 없는 명성(名聲)은 저의 종교가 되었나 봅니다 정복할 수도 정복될 수도 없는 성병에 걸려서 스스로를 얼마나 속이며 기만했으며 꿈과 성병을 구별하지 못했던가를 선망과 조롱으로 우습게 보았던 타인과 자신을 사람 본래로 보게 눈 열어주십시오 죽는 순간까지도 해방될 수 없다는 그 성병을 저만은 반드시 살아서 고쳐서 잘 살아보고 싶습니다 - 성..

시읽는기쁨 2009.09.05

오래된 물음 / 김광규

누가 그것을 모르랴 시간이 흐르면 꽃은 시들고 나뭇잎은 떨어지고 짐승처럼 늙어서 우리도 언젠가 죽는다 땅으로 돌아가고 하늘로 사라진다 그래도 살아갈수록 변함없는 세상은 오래된 물음으로 우리의 졸음을 깨우는구나 보아라 새롭고 놀랍고 아름답지 않느냐 쓰레기터의 라일락이 해마다 골목길 가득히 뿜어내는 깊은 향기 볼품 없는 밤송이 선인장이 깨어진 화분 한 귀퉁이에서 오랜 밤을 뒤척이다가 피워낸 밝은 꽃 한 송이 연못 속 시커먼 진흙에서 솟아오른 연꽃의 환한 모습 그리고 인간의 어두운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의 고운 미소는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만들지 않느냐 맨발로 땅을 디딜까봐 우리는 아기들에게 억지로 신발을 신기고 손에 흙이 묻으면 더럽다고 털어준다 도대체 땅에 뿌리박지 않고 흙도 몸에 묻히지 않고 뛰놀며 자라는..

시읽는기쁨 2009.09.02

김밥의 시니피앙 / 정일근

표준어로 유순하게 [김:밥]이라 말하는 것보다 경상도 된소리로 [김빱]이라 말할 때 그 말이 내게 진짜 김밥이 된다 심심할 때 먹는 배부른 김밥이 아니라 소풍갈 때 일 년에 한두 번 먹었던 늘 배고팠던 우리 어린 시절의 그 김빱 김밥천국 김밥나라에서 마음대로 골라먹는 소고기김밥 참치김밥 김치김밥 다이어트김밥 아니라 소풍날 새벽 일찍 어머니가 싸주시던 김밥 내게 귀한 밥이어서 김밥이 아니라 김빱인 김빱이라 말할 때 저절로 맛이 되는 나의 가난한 시니피앙 - 김밥의 시니피앙 / 정일근 시니피앙? 이 말을 모르면 어디 가서 지식인 행세를 하기 어렵다. 그러나한 가지 분명한 것은 지식인들은 쉽고 단순한 것을 무척 어려운 말로 설명하는 재주가 특별하다는 것이다. 말에는 개인의 추억과 정서가 묻어 있다. 똑 같은 ..

시읽는기쁨 2009.08.29

달의 뒤편 / 장옥관

등 긁을 때 아무리 용써도 손 닿지 않는 곳이 있다 경상도 사람인 내가 읽을 수는 있어도 발음할 수 없는 시니피앙 '아'와 '으', 달의 뒤편이다 천수관음처럼 손바닥에 눈알 붙이지 않는 한 볼 수 없는 내 얼굴, 달의 뒤편이다 물고문 전기고문 꼬챙이에 꿰어 돌려도 모르는 것은 모르는 것 더듬이 떼고 날개 떼어 구워 먹을 수는 있어도 빼앗을 수 없는 귀뚜라미 울음 같은 것, 내 눈동자의 뒤편이다 - 달의 뒤편 / 장옥관 대통령의 죽음과 로켓 발사 실패와는 어떤 연관이 있는 것일까. 지난 봄 노무현 대통령 타계시에는 북쪽에서 로켓 발사로 시끄럽더니, 이번 여름 김대중 대통령 타계시에는 남쪽에서 또 난리다. 북과 남이 연이어 발사 경쟁을 벌이는 이면에는 복잡한 국제 정치의 역학관계가 있을 것이다. 달의 뒤편이..

시읽는기쁨 2009.08.28

세월이 오며는 / 김대중

세월이 오며는 다시 만나요 넓고 큰 광장에서 춤을 추면서 깃발을 높이 들고 만세 부르며 얼굴을 부비댄채 얼싸안아요 세월이 오며는 다시 만나요 눈물과 한숨을 걷어치우고 운명의 저줄랑 하지 말 것을 하나님은 결코 죽지 않아요 세월이 오며는 다시 만나요 입춘의 매화가 어서 피도록 대지의 먼동이 빨리 트도록 생명의 몸부림을 끊지 말아요 - 세월이 오며는 / 김대중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오늘 열린다. 약 3 개월 사이에 전직 두 대통령이 운명하시게 되었다. 묘하게도 두 분 다 진보쪽을 대표하는 분들이어서 더욱 아쉬움이 크다. 이 시는 김 전 대통령이 1973년 6월 16일 일본에서 미국 달라스로 가는 비행기 속에서 쓴 것으로적혀 있다. 당시 비행기에서 이 시를 받은 사람이 이번에 처음 공개한 것이다. 19..

시읽는기쁨 2009.08.23

죽은 줄도 모르고 / 김혜순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황급히 일어난다 텅 빈 가슴 위에 점잖게 넥타이를 매고 메마른 머리칼에 반듯하게 기름을 바르고 구더기들이 기어나오는 내장 속에 우유를 쏟아붓고 죽은 발가죽 위에 소가죽 구두를 씌우고 묘비들이 즐비한 거리를 바람처럼 내달린다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먼지를 털며 돌아온다 죽은 여자의 관 옆에 이불을 깔고 허리를 굽히면 메마른 머리칼이 쏟아져 쌓이고 차가운 이빨들이 입 안에서 쏟아진다 그 다음 주름진 살갗이 발 아래 떨어지고 죽은 줄도 모르고 그는 다시 죽음에 들면서 내일 묘비에 새길 근사한 한마디 쩝쩝거리며 관 뚜껑을 스스로 끌어올린다 - 죽은 줄도 모르고 / 김혜순 올 여름에는 여러 편의 공포영화를 보며 집에서 지냈다. 공포영화는 별로 좋아하지 않는 장르지만 마음이 뒤숭숭한 탓인지 ..

시읽는기쁨 2009.08.20

풍장 1 / 황동규

내 세상 뜨면 풍장시켜다오 섭섭하지 않게 옷은 입은 채로 전자시계는 가는 채로 손목에 달아 놓고 아주 춥지는 않게 가죽가방에 넣어 전세 택시에 싣고 群山에 가서 검색이 심하면 곰소쯤에 가서 통통배에 옮겨 실어다오 가방 속에서 다리 오그리고 그러나 편안히 누워 있다가 선유도 지나 무인도 지나 통통소리 지나 배가 육지에 허리 대는 기척에 잠시 정신을 잃고 가방 벗기우고 옷 벗기우고 무인도의 늦가을 차가운 햇빛 속에 구두와 양말도 벗기우고 손목시계 부서질 때 남몰래 시간을 떨어뜨리고 바람 속에 익은 붉은 열매에서 툭툭 튕기는 씨들을 무연히 안 보이듯 바라보며 살을 말리게 해 다오 어금니에 박혀 녹스는 白金조각도 바람 속에 빛나게 해 다오 바람 이불처럼 덮고 化粧도 解脫도 없이 이불 여미듯 바람을 여미고 마지막..

시읽는기쁨 2009.08.17

아이를 키우며 / 렴형미

처녀시절 나 홀로 공상에 잠길 때며는 무지개 웃는 저 하늘가에서 날개 돋쳐 훨훨 나에게 날아오던 아이 그 애는 얼마나 곱고 튼튼한 사내였겠습니까 그러나 정작 나에게 생긴 아이는 눈이 크고 가냘픈 총각 애 총 센 머리칼 탓인 듯 머리는 무거워 보여도 물푸레아지 인 양 매출한 두 다리는 어방없이 날쌘 장난꾸러기입니다. 유치원에서 돌아오기 바쁘게 고삐 없는 새끼염소마냥 산으로 강으로 내닫는 그 애를 두고 시어머니도 남편도 나를 탓 합니다 다른 집 애들처럼 붙들어놓고 무슨 재간이든 배워줘야 하지 않는가고 그런 때면 나는 그저 못 들은 척 까맣게 탄 그 애 몸에 비누거품 일구어댑니다 뭐랍니까 그 애 하는 대로 내버려두는데 정다운 이 땅에 축구공마냥 그 애 맘껏 딩구는데 눈 올 때면 눈사람도 되어 보고 비 올 때면..

시읽는기쁨 2009.08.13

발자국 / 김명수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 발자국 / 김명수 발자국 남기는 건 유정한 인간의 일, 그 흔적 지우는 건 무심한 파도의 일.... 사람아, 그 흔적에 연연해 말아라. 때 되면 바다의 아늑한 품으로 돌아가리니, 그제야 타향살이 끝내고 본향에서 안식하리니...

시읽는기쁨 2009.08.06

묵뫼 / 신경림

여든까지 살다 죽은 팔자 험한 요령잡이가 묻혀 있다 북도가 고향인 어린 인민군 간호군관이 누워 있고 다리 하나를 잃은 소년병이 누워 있다 등너머 장터에 물거리를 대던 나무꾼이 묻혀 있고 그의 말더듬던 처를 꼬여 새벽차를 탄 등짐장수가 묻혀 있다 청년단장이 누워 있고 그 손에 죽은 말강구가 묻혀 있다 생전에는 보지도 알지도 못했던 이들도 있다 부드득 이를 갈던 철천지원수였던 이들도 있다 지금은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목뫼 위에 쑥부쟁이 비비추 수리취 말나리를 키우지만 철 따라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으면서 뜸부기 찌르레기 박새 후투새도 불러 모으고 함께 숲을 만들고 산을 만들고 세상을 만들면서 서로 하얀 이마를 맞댄 채 누워 - 묵뫼 / 신경림 묵뫼란 오랫동안 돌보지 않아 거칠어진 무덤을 뜻한다. ..

시읽는기쁨 2009.08.02

쉬 / 문인수

그의 상가엘 다녀왔습니다. 환갑을 지난 그가 아흔이 넘은 그의 아버지를 안고 오줌을 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생(生)의 여러 요긴한 동작들이 노구를 떠났으므로 , 하지만 정신은 아직 초롱 같았으므로 노인께서 참 난감해 하실까봐 "아버지, 쉬, 쉬이, 어이쿠, 어이쿠, 시원허시것다아" 농하듯 어리광 부리듯 그렇게 오줌을 뉘였다고 합니다. 온몸, 온몸으로 사무쳐 들어가듯 아, 몸 갚아드리듯 그렇게 그가 아버지를 안고 있을 때 노인은 또 얼마나 더 작게, 더 가볍게 몸 움츠리려 애썼을까요. 툭, 툭, 끊기는 오줌발, 그러나 그 길고 긴 뜨신 끈, 아들은 자꾸 안타까이 땅에 붙들어매려 했을 것이고 아버지는 이제 힘겹게 마저 풀고 있었겠지요. 쉬- 쉬! 우주가 참 조용하였겠습니다. - 쉬/ 문인수 외할머니는 온몸..

시읽는기쁨 2009.07.29

삶의 아름다운 장면 하나 / 용혜원

그대에게 기억하고 싶고 소중하게 간직하고 싶고 누구에게나 말하고 싶은 삶의 아름다운 장면 하나 있습니까 그 그리움 때문에 삶을 더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은 용기가 나고 힘이 생기는 삶의 아름다운 장면 하나 - 삶의 아름다운 장면 하나 / 용혜원 집에서 놀다보니 아침에 방송되는 KBS TV의 '아침마당'을 가끔 보게 된다. 어제는용혜원 시인이 출연해서 삶에 대한 강의를 한 시간 동안 했다. 용혜원 시인은 사랑에 관한 감미로운 시를 쓰시는 분으로 알고만 있었는데 본인의 모습과 목소리를 들은 것은 처음이었다. 전에 그분의 시를 접하면서 시인은 어떤 분이실까 하고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시를 통해서 연상되었던 이미지와 실제의 모습이정반대였다. 조용하고 여성적일 줄 알았는데 전혀 딴 판이었던 것이다..

시읽는기쁨 2009.07.24

? / 문무학

물음표는 사람의 귀, 귀를 많이 닮아 있다 물어 놓고 들으려면 귀 있어야 된다는 듯 보이지 않는 쪽으로 그 언제나 열려 있다 물음표는 낚싯바늘, 낚싯바늘 그것 같다 세상 바다 떠다니는 수도 없는 의문들 그 대답 물어 올리려 갈고리가 된 것이다 물음표는 그렇다 문명의 근원이다 그 숱한 궁금증을 하나하나 풀어낸 인간의 역사는 본디 의문을 푼 내력이다 - 문장부호 시로 읽기; ? / 문무학 문무학 시인의 '낱말'이라는 재미있는 시집이 나왔다. 문장부호와 낱말, 그리고 품사를 시로 읽기라는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주로 낱말들의 의미를 새로이 발견하려는 노력이 돋보인다. 특히 글자의 모양이나 상형성에 주목하여 한글이 가진 의미를 재미있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나 내용적으로는 좀 깊이가 떨어지는 아쉬움은 있다. 시집에..

시읽는기쁨 2009.07.21

치마 / 문정희

벌써 남자들은 그곳에 심상치 않은 것이 있음을 안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기는 있다 가만두면 사라지는 달을 감추고 뜨겁게 불어오는 회오리 같은 것 대리석 두 기둥으로 받쳐 든 신전에 어쩌면 신이 살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 은밀한 곳에서 일어나는 흥망의 비밀이 궁금하여 남자들은 평생 신전 주위를 맴도는 관광객이다 굳이 아니라면 신의 후손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그들은 자꾸 족보를 확인하고 후계자를 만들려고 애를 쓴다 치마 속에 확실히 무언가 있다 여자들이 감춘 바다가 있을지도 모른다 참혹하게 아름다운 갯벌이 있고 꿈꾸는 조개들이 살고 있는 바다 한번 들어가면 영원히 죽는 허무한 동굴? 놀라운 것은 그 힘은 벗었을 때 더욱 눈부시다는 것이다 - 치마 / 문정희 생물학적으로 볼 때 남과 여, 그다사다난함의 배..

시읽는기쁨 2009.07.15

놀란 강 / 공광규

강물은 몸에 하늘과 구름과 산과 초목을 탁본하는데 모래밭은 몸에 물의 겸손을 지문으로 남기는데 새들은 지문 위에 발자국 낙관을 마구 찍어대는데 사람도 가서 발자국 낙관을 꾹꾹 찍고 돌아오는데 그래서 강은 수천 리 화선지인데 수만리 비단인데 해와 달과 구름과 새들이 얼굴을 고치며 가는 수억 장 거울인데 갈대들이 하루 종일 시를 쓰는 수십억 장 원고지인데 그걸 어쩌겠다고? 쇠붙이와 기계소리에 놀라서 파랗게 질린 강 - 놀란 강 / 공광규 그들은 독한 사람들이다. 22조라는 거금을 쏟아부어 강을 파헤치겠단다. '4대강 살리기'라고? 웃기는 소리다. 그들은 지방 토호들과 일부 건설업자들 배를 불리기 위해 강을 죽이려 한다. 자연을 개발과 투기의 대상으로만 보는 저들의 시선이 무섭다. 모든 것이 돈으로만 보이는 ..

시읽는기쁨 2009.07.09

性 / 김수영

그것하고 하고 와서 첫번째로 여편네와 하던 날은 바로 그 이튿날 밤은 아니 바로 그 첫날 밤은 반시간도 넘어 했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그년하고 하듯이 혓바닥이 떨어져나가게 물어제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어지간히 다부지게 해줬는데도 여편네가 만족하지 않는다 이게 아무래도 내가 저의 섹스를 槪觀하고 있는 것을 아는 모양이다 똑똑히는 몰라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모양이다 나는 섬찍해서 그전의 둔감한 내 자신으로 다시 돌아간다 憐憫의 순간이다 恍惚의 순간이 아니라 속아 사는 憐憫의 순간이다 나는 이것이 쏟고난 뒤에도 보통때보다 완연히 한참 더 오래 끌다가 쏟았다 한번 더 고비를 넘을 수도 있었는데 그만큼 지독하게 속이면 내가 곧 속고 만다 - 性 / 김수영 김수영 시인도 이런 시를 썼다는 사실이 신기하다. ..

시읽는기쁨 2009.07.05

눈 / 김수영

눈은 살아있다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마당 위에 떨어진 눈은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 위에 대고 기침을 하자 눈더러 보라고 마음놓고 마음놓고 기침을 하자 눈은 살아있다 죽음을 잊어버린 영혼과 육체를 위하여 눈은 새벽이 지나도록 살아있다 기침을 하자 젊은 시인이여 기침을 하자 눈을 바라보며 밤새도록 고인 가슴의 가래라도 마음껏 뱉자 - 눈 / 김수영 예전부터 이 시에 나타난 눈의 이미지를 어떻게 읽을지 망설여졌다. 하얀 눈은 순수와 순결의 상징이지만 여기서는 꼭 그렇지만도 아닌 것 같다. 그래서 좀 삐딱한 독해을 하고 싶다. 눈은 세상의 사물을 한 가지 색으로 덮어 버린다. 눈으로 보기에는 아름다운 풍경일지 모르지만 그것이 세상의 진실은 아니다. 그래서 눈을 '순수로 위장된 거짓'..

시읽는기쁨 2009.06.30

영목에서 / 윤중호

어릴 때는 차라리, 집도 절도 피붙이도 없는 처량한 신세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뜬구름처럼 아무 걸림 없이 떠돌다 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칼날 같은 세상의 경계에 서고 싶은 적이 있었다. 자유라는 말, 정의라는 말, 노동이라는 말, 그리고 살 만한 세상이라는 말, 그 날 위에 스스로 채찍질하며 고개 숙여 몸을 던져도 좋다고 생각했다. 한때는 귀신이 펑펑 울 그런 해원의 詩를 쓰고 싶었다. 천년의 세월에도 닳지 않을, 언뜻 주는 눈길에도 수만 번의 인연을 떠올려 서로의 묵은 업장을 눈물로 녹이는 그런 詩. 이제 이 나이가 되어서야, 지게작대기 장단이 그리운 이 나이가 되어서야, 고향은 너무 멀고 그리운 사람들 하나 둘 비탈에 묻힌 이 나이가 되어서야, 돌아갈 길이 보인다. 대천 뱃길..

시읽는기쁨 2009.06.25

춤 / 이종암

그녀한테서 문자가 왔다 팔공산 영불암* 오르는 길, 연초록 드레스를 입은 무용수들이 일제히 왈츠를 추고 있어요 어쩌란 말인가 그 왈츠의 상대는 아마도 푸른 바람이겠지 연초록 나뭇잎들이 일제히 바람과 손 맞잡고 왈츠를 춘다고, 하하 그렇게 우리도 손 맞잡고 춤추자는 것인가 부처를 맞이한다는 영불암 가는 길이니 소신공양燒身供養 몸과 마음마저 다 내어주는 사랑을 저도 알고 있는 것이겠지 춤을 추자고 한다 사랑은 끝없이 춤추는 거라고, 그녀가 대낮에 춤추는 문자를 보내왔다 골똘히, 춤 속으로 나는 걸어간다 * 그녀가 말한 팔공산 영불암은 염불암의 오기였다. 그러나 어쩌랴, 처음 그녀가 보내준 문자대로 영불암을 마음에 들고 나는 이미 이렇게 시를 써버린 것을 - 춤 / 이종암 사랑에 대한 남자의 독법을 이 시는 ..

시읽는기쁨 2009.06.19

그리운 악마 / 이수익

숨겨 둔 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몰래 나 홀로 찾아 드는 외진 골목길 끝, 그집 불 밝은 窓門 그리고 우리 둘 사이 숨막히는 暗號 하나 가졌으면 좋겠다. 아무도 눈치 못 챌 비밀 사랑, 둘만이 나눠 마시는 罪의 달디단 祝杯 끝에 싱그러운 젊은 심장의 피가 뛴다면! 찾아가는 발길의 고통스런 기쁨이 만나면 곧 헤어져야 할 아픔으로 끝내 우리 침묵해야 할지라도, 숨겨 둔 情婦 하나 있으면 좋겠다. 머언 기다림이 하루종일 전류처럼 흘러 끝없이 나를 충전시키는 여자, 그 악마 같은 여자. - 그리운 악마 / 이수익 아무리 시인일지라도 이렇게 적나라하게 속마음을 드러내도 되는지 모르겠다. 다른 사람 눈치도 있을 텐데, 더구나 시인의 부인이 이 시를 본다면 기분이 어떨지 헤아리기나 했는지. 그러나 한 편으로는 시..

시읽는기쁨 2009.06.15

물에게 길을 묻다 / 천양희

세상에서 가장 큰 즐거움은 사람으로 태어나는 것이라고 누가 말했었지요 그래서 나는 사람으로 살기로 했지요 날마다 살기 위해 일만 하고 살았지요 일만 하고 사는 것이 쉽지는 않았지요 일터는 오래 바람 잘 날 없고 인파는 술렁이며 소용돌이쳤지요 누가 목소리를 높이기라도 하면 소리는 나에게까지 울렸지요 일자리 바뀌고 삶은 또 솟구쳤지요 그때 나는 지하 속 노숙자들을 생각했지요 실직자들을 떠울리기도 했지요 그러다 문득 길가의 취객들을 흘끗 보았지요 어둠속에 웅크리고 추위에 떨고 있었지요 누구의 생도 똑같지는 않았지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건 사람같이 사는 것이었지요 그때서야 어려운 것이 즐거울 수도 있다는 걸 겨우 알았지요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사람같이 산다는 것과 달랐지요 사람으로 살수록 삶은 더 붐볐지요 오..

시읽는기쁨 2009.06.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