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2

먼산 바라기 / 박찬

산을 오르는 것은 거기 산이 있어서만이 아니다. 산 너머 풍경이 그리운 때문이다. 산기슭 어느 한적한 마을이 그려지는 것이다. 산을 넘으면 또 산. 그 너머 널따랗게 펼쳐진 들을 지나 뉘엿뉘엿 해 넘어가는 산 그 어디쯤.... 피처럼 나를 당기는 풍경이 그리웁기 때문이다. 그 풍경, 실은 나도 몰라, 산 넘어 산마을 지나, 강 건너 들을 지나 해지는 서산을 바라보며 가고 있는 것이다. 끝없이 먼산 바라기를 하는 것이다. - 먼산 바라기 / 박찬 '먼.산.바.라.기.'로 블로그의 문패를 바꾸었다. '먼산바라기'는 그저 먼 산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다는 뜻의 순수한 우리말이다.이 말에 담긴이미지를 그리다 보면 어릴 적 따스한 햇살 비치는 툇마루에서 나른하게 먼 산을 바라보던 모습이 떠오른다. 열병을 앓고난 ..

시읽는기쁨 2010.03.06

사는 이유 / 최영미

투명한 것은 날 취하게 한다 시가 그렇고 술이 그렇고 아가의 뒤뚱한 걸음마가 어제 만난 그의 지친 얼굴이 안부 없는 사랑이 그렇고 지하철을 접수한 여중생들의 깔깔웃음이 생각나면 구길 수 있는 흰 종이가 창 밖에 비가 그렇고 빗소리를 죽이는 강아지의 컹컹거림이 매일 되풀이되는 어머니의 넋두리가 그렇다 누군가와 싸울 때마다 난 투명해진다 치열하게 비어가며 투명해진다 아직 건재하다는 증명 아직 진통할 수 있다는 증명 아직 살아있다는 무엇 투명한 것끼리 투명하게 싸운 날은 아무리 마셔도 술이 오르지 않는다 - 사는 이유 / 최영미 다시 핸드폰의 알람을 ON 시킨다. 30여 년 동안이나 젖었지만 아직도 익숙하지 않은 틀 속으로들어간다. 낡고 진부한 삶의 겉옷을 걸친다. "행복한 줄 알아요. 아무도 불러주는 데가 ..

시읽는기쁨 2010.03.02

나는 굽 없는 신발이다 / 문차숙

그때는 뾰족 구두로 똑, 똑 소리 나게 걸었는데 나이가 들수록 신발 굽이 낮아진다. 그저 높낮이 없이 바닥이 평평하고 언제 끌고 나가도 군말 없이 따라 오는 편안한 신발이 좋다. 내가 콕, 콕 땅을 후비며 걸었을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헤지게 했는지 또닥거리며 걸었을 때, 또 얼마나 많은 이들에게 가슴 저리게 울렸을지 굽을 낮추면서 알겠다. 신발이 닳아 저절로 익숙해진 낮은 굽은 굽 높은 신발이 얼마나 끄덕거리면서 흔들흔들 살아가는지 말해준다. 이제 나는 온들 간들 소리 없고 발자국도 남기지 않는 하얀 고무신이고 싶다. 어쩌다 작은 발이 잠깐 다녀올 때 쏘옥 신을 수 있고 큰 발이 꺾어 신어도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는, 나는 굽이 없는 신발이다. - 나는 굽 없는 신발이다 / 문차숙 얼마 전 출근..

시읽는기쁨 2010.02.22

끼니 / 고운기

멀쩡한 제집 두고 때 되어도 밖에서 끼니를 때우는 일은 다반사(茶飯事) 도대체 집은 뭐하러 있는 거야? 아침은 얻어먹고 사냐는 멍청한 질문도 굳이 마누라 타박할 문법은 아니지 차라리 못 살았다는 옛날 생각이 나는 거야 새벽밥 해먹고 들일 나가 날라 오는 새참이며 점심 바구니 끼니마다 집에서 만든 밥 먹던 생각 차라리 그것이 힘의 원천 저녁이면 큰 상 작은 상 각기 제 몫의 상에 앉아 제 밥그릇 찾아먹는 것이 좋았다는 생각 무슨 벼슬한다고 이 식당 저 식당 돌아다니며 제 그릇 하나 찾아먹지 못하고 사노 먹는 게 아니라 때우면서 만주벌판 독립운동이라도 하나 멀쩡한 제집 두고 밖으로만 나다니면서 - 끼니 / 고운기 전 직장의 동료 P는 술자리에서 늘 호기있게 말하며 우리를 웃겼다. 그중에 이런 말도 있었다. ..

시읽는기쁨 2010.02.19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흔들리며 피는 꽃 / 도종환 고향으로 내려가는 설날 귀향길에 올해는 톨게이트에서시낭송 CD를 나누어주었다. 솔직히 4대강이나 세종시 홍보물을 받으면 어쩌나 했는데 의외였다. 덕분에 시와 함께 하는 고향길이 되었다. 아는 시가 나오면 반가웠고, 더구나 시인의 육성으로 들으니 더욱 좋았다. 가슴이 울컥해지는 시가 몇 편 있었는데 이 시도 그중의 하나였다. 누구나 마찬가지일 ..

시읽는기쁨 2010.02.15

노팬티와 파타고니아 / 구광렬

꽉 끼는 것에 꽉 끼이지 않기 위해 원시의 땅 파타고니아를 간다 모든 것이 헐렁하다 원숭이도 대충 나무에서 떨어지고 사람들은 *마냐나를 외치며 웬 종일 잠만 잔다 바람은 수 만 년을 방향 없이 불어대고 미친 듯 머리채를 흔드는 들꽃들엔 이름이 없다 아니 각자 좋아하는 꽃에다 자기 이름을 갖다 붙이니 너무 많은 이름들이 설렁댄다 동물의 이름 또한 촘촘치 않다 이빨이 있는 고긴 이빨고기 꼬리가 긴 원숭인 긴꼬리원숭이 꼬리가 더 긴 원숭인 긴긴꼬리원숭이.... 대평원엔 소떼들이 게으른 목동들을 몰고 다니다 석양 속으로, 석양은 대평원 속으로 대평원은 또 하나 점으로 페이드 아웃되지만 모두 사라질 뿐 돌아오마 기약 없다 신은 인간들이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도록 날개 하나씩을 달아줬다 - 가끔 그 날개는 고통..

시읽는기쁨 2010.02.11

제대로 된 혁명 / 로렌스

혁명을 하려면 웃고 즐기며 하라 지나치게 심각하게는 하지 마라 너무 진지하게도 하지 마라 그저 재미로 하라 사람들이 미워서 혁명을 해서는 안된다 그저 그들의 눈에 침 한번 뱉기 위해서 하라 돈을 좇는 혁명을 하지 말고 돈을 깡그리 비웃는 혁명을 하라 획일을 추구하는 혁명을 하지 마라 혁명은 우리의 산술적 평균을 깨는 결단이어야 한다 사과 실린 수레를 뒤집고 사과가 어느 쪽으로 굴러가는가를 보는 건 얼마나 재미있는가 노동자 계급을 위한 혁명도 하지 마라 우리 모두가 자력으로 작은 귀족이 되는 혁명을 하라 즐겁게 도망치는 당나귀들처럼 뒷발질이나 한번 하라 어쨌든 세계 노동자들을 위한 혁명은 하지 마라 노동은 우리가 이제껏 너무 많이 해온 게 아닌가 노동을 폐지하자, 일하는 것에 종지부를 찍자! 일은 재미일 ..

시읽는기쁨 2010.02.05

그 기쁨의 순간들은 / 심호택

도대체 어디로 날아갔나 그 기쁨의 순간들은 살구철이 지난 어느 날 우거진 잎새 사이에서 얼핏! 샛노란 살구 하나 찾아냈을 때 고구마 캐낸 빈 밭에서 무심코 쟁기질 뒤따르는데 덜렁! 고구마 한 덩이 뒤집혀 나올 때 사정없이 가슴이 콩당거리던 그만큼은 아닐지라도 그만큼은 아닐지라도 - 그 기쁨의 순간들은 / 심호택 신문에서 시인의 부음 기사를 보고 깜짝 놀랐다. 한밤중의 교통사고로 갑자기 운명하셨다고 한다. 시인의 시를 사랑하는 독자로서 안타깝고 가슴이 아프다. 시인은 유년 시절의 동심을 그립도록 아름답게 묘사해 내는 솜씨가 뛰어나셨다. 특히 '그만큼 행복한 날이'는 가슴을 울리는 절창이었다. 선생님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 어머니 나를 가르치며 잘못 가르친 것 한 가지 일꾼에게 궂은 일 시켜놓고 봐라 ..

시읽는기쁨 2010.02.02

바보 이력서 / 임보

친구들은 명예와 돈을 미리 내다보고 법과대학에 들어가려 혈안일 때에 나는 영원과 아름다움을 꿈꾸며 어리석게 문과대학을 지원했다 남들은 명문세가를 좇아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현모양처를 구했다 이웃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강을 넘어 남으로 갔을 때 나는 산을 떨치지 못해 추운 북녘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땅을 사서 값진 과목들을 심을 때 나는 책을 사서 몇 줄의 시를 썼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더디고 사물을 향한 내 예감은 늘 빗나갔다 그래서 한평생 내가 누린 건 무명과 빈곤이지만 그래서 또한 내가 얻은 건 자유와 평온이다 - 바보 이력서 / 임보 행인지 불행인지 지금까지 이력서란 걸 거의 써보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동으로 취직이 되었고, 그 뒤로는..

시읽는기쁨 2010.01.31

국도 / 윤제림

버스 뒤에 레미콘 트럭, 트럭 뒤에 소나타, 소나타 뒤에 경운기, 경운기 뒤에 세상에서 가장 느린 탈것 하나가 세상 모든 탈것들을 줄줄이 멈춰 세웠습니다. 느릿느릿 길을 건너 산길로 접어든 꽃상여 하나, 찻길을 막아놓고서는 제 자신도 솔밭머리에서 제자리걸음입니다. 시동을 끄고 내려서 담배를 피워 무는 버스 기사를 보고 레미콘 트럭이 경적을 울려댑니다. 그 소리에 놀란 깃발과 사람들이 길 양편으로 흘러내립니다. 버스 기사가 차에 오릅니다. 차창 밖을 내다보던 새댁 하나가 품에 안은 아이 손을 붙잡고 빠이빠이를 합니다. 멈췄던 차들이 가던 길을 갑니다. 버스 뒤에 레미콘 트럭, 트럭 뒤에 소나타, 소나타 뒤에 경운기, 경운기 뒤에 코란도, - 국도 / 윤제림 "비스타리 비스타리", 4000 m 높이의 히말라..

시읽는기쁨 2010.01.27

그리움 / 이용악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험한 벼랑을 굽이굽이 돌아간 백무선(白茂線) 철길 위에 느릿느릿 밤새워 달리는 화물차의 검은 지붕에 연달린 산과 산 사이 너를 남기고 온 작은 마을에도 복된 눈 내리는가 잉크병 얼어드는 이러한 밤에 어쩌자고 잠을 깨어 그리운 곳 차마 그리운 곳 눈이 오는가 북쪽엔 함박눈 쏟아져 내리는가 - 그리움 / 이용악 이 시를 처음 읽었을 때 하얀 설원을 기차가 달리는 영화 '닥터 지바고'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그것은 '백무선'(白茂線)이라는 이국적인 철길 이름에다 함박눈 속을 느릿느릿 달리는 화물차의 영상이 낭만적으로 그려지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그러므로 시인의 그리움은 간절하긴 하지만 구차하진 않다. 비록 한밤중에 잠이 깨어 잠 못 들지만 고향에 내리는 함박눈을 연..

시읽는기쁨 2010.01.20

폭설 / 오탁번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

시읽는기쁨 2010.01.17

새와 산 / 이오덕

새 한 마리 하늘을 간다. 저쪽 산이 어서 오라고 부른다. 어머니 품에 안기려는 아기같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고 날아가는구나! - 새와 산 / 이오덕 사랑방에 장작으로 군불을 넣고 뜨끈한 아랫목에 누워 책을 본다. 졸리면 자고, 배 고프면 밥 차려먹고, 한없이 빈둥거리며 지낸다. 밖에는 찬 바람 소리 마른 나뭇가지를 울리며 지나갈 뿐 시골의 겨울은 인적 그쳐 적막하다. 폭설이라도 내려 길마저 끊어진다면 더욱 반길 일이다. 방학에 들기 전 이런 계획을 말했더니 모두들 부러워했다. 오늘 고향에 내려간다. 한 마리 새가 되어 넓고 따스한 고향의 품을 찾아간다. 지난 추석 이후에 허리 핑계를 대며 발걸음을 못한 터라 더욱 반갑다. 한 번 내려왔다가라는 어머니의 목소리에도 기다림이 묻어 있었다. 한 일주일 원없..

시읽는기쁨 2010.01.08

적설 / 신현정

흰 눈이 쌓이다 보면 그 속이 캄캄하다 흰 눈도 무너질 땐 그 속이 캄캄하다 문득 노송老松이 팔뚝 하나를 주어버린다 - 적설 / 신현정 어제 눈이 많이 내렸다. 서울에 내린 눈으로는 기상 관측 이래 최대라고 한다. 고지대에 있는 우리 집은 밖과 연결되는 도로가 하루 내내 통행 불능이 되었다. 덕분에 낮이 조용해졌다. 오늘에야 느릿느릿 차들이 겨우 움직인다. 눈이 질주하던 자동차를 세우고 거북이가 되게 만들었다. 출근하는 사람들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괜히 기분이 좋아진다. 어느날 갑자기 이렇게도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더없이 신선하다. 한나절의 눈만으로도 난공불락으로 보이던 대도시가 항복을 했다.

시읽는기쁨 2010.01.05

꽃자리 / 구상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앉은 자리가 꽃자리니라! 네가 시방 가시방석처럼 여기는 너의 앉은 그 자리가 바로 꽃자리니라. 반갑고 고맙고 기쁘다. - 꽃자리 / 구상 해가 바뀌었다. 새 희망과 결심으로 잠깐 설레는 아침이다.이 시를 2010년의 첫 시로 읽는다. 무엇을 바라기보다는 내 있는 자리에 만족하는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삶에 좀더 너그러워지기,덜 아등바등거리기, 그리고 고맙고 기쁘게 살고 싶다. 올 한 해.....

시읽는기쁨 2010.01.01

그 섬에 가고 싶다 / 장혜원

섬, 바로 그 섬 바다와 하늘이 가슴을 맞대고 병풍처럼 감싸안고 있는 그 섬에 가고 싶다 사나흘 쯤 소리가 없는, 울림이 없는 사람의 말소리가 들리지 않는 그 섬에 묵고 싶다 그대와 묵고 싶다 붉게 물든 노을 한아름 걷어다가 이불을 삼고 밤바다에 첨벙거리는 별 하나 등불 삼아 매달아 그대 숨소리 가슴에 안고 그대 체온 피부로 느끼며 밤새워 우리만의 연가를 부르리 뜻밖의 풍랑을 만나 이틀 쯤 발이 묶인다면 발을 동동 구르리 가슴 속의 기쁨 그대가 눈치 채지 못하도록 숨 죽이리 - 그 섬에 가고 싶다 / 장혜원 일탈 욕구도 인간의 기본 욕구라고 한다. 사실 사람은 어느 집단에 소속됨으로써 편안함을 느낀다. 혼자라는 것만큼 외롭고 불안한 것도 없다. 출생 지역이나 출신 학교끼리 울타리를 만들고 '우리가 남이가..

시읽는기쁨 2009.12.26

섬 / 함민복

물 울타리를 둘렀다 울타리가 가장 낮다 울타리가 모두 길이다 - 섬 / 함민복 울타리는 너와 나를 가르는 경계다. 네 것과 내 것을 구분하는 장벽이다. 그런데 높이가 없는 울타리, 너에게로 가는 길이 되는 울타리도 있다. 섬을 둘러싼 바다를 물 울타리로 보는 시각이 재미있고, 일반적인 울타리의 속성을 뒤집어버리는 시인의 관점도 신선하다. 사물을 보는 시각이 얼마나 다양한가. 이런 시를 읽으면 참 즐겁다.

시읽는기쁨 2009.12.24

행복 / 천상병

나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사나이다. 아내가 찻집을 경영해서 생활의 걱정이 없고 대학을 다녔으니 배움의 부족도 없고 시인이니 명예욕도 충분하고 이쁜 아내니 여자 생각도 없고 아이가 없으니 뒤를 걱정할 필요도 없고 집도 있으니 얼마나 편안한가. 막걸리를 좋아하는데 아내가 다 사주니 무슨 불평이 있겠는가. 더구나 하나님을 굳게 믿으니 이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분이 나의 빽이시니 무슨 불행이 온단 말인가! - 행복 / 천상병 괴테는 자신의 일생동안 행복했던 때는 17시간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행복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누구나 행복을 위해서 산다고 하지만 그 과실을 맛보는 사람은 거의 없다. 특히 지금과 같은 시대에 행복하다는 것은 어떤 점에서는 모욕적이기도 하다. 자급자족하는 로빈슨 크루소가 되지 않는 한 나..

시읽는기쁨 2009.12.21

밭 한 뙈기 / 권정생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것은 없다. 하나님도 '내'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리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건 내 것이 아니라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 밭 한 뙈기 / 권정생 아파보면 내 몸도 내 것이 아님을 알게 된다. 내 능력이나 재주도 마찬가지다. 하물며 다른 것들이야 말할 필요도 없다. 내 소유물임을 나타내는 증서는 일종의 차용증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제 자리로 돌아간다는데 아쉬울 것 없어야한다. 내 것이라고 우기니 욕심도 생기고 속도 끓이게 되는 것이다...

시읽는기쁨 2009.12.17

이별 / 정진규

그 여자와 작별하면서 나는 그 여자에게 이제 어머니로 돌아가라고 말한 바 있다 너는 이제 어머니가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여자는 함께 있으면 계집이 되고 헤어지면 어머니가 된다 그게 여자의 몸이라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 이별 / 정진규 며칠 전 초등학교 동기들의 송년회가있었다. 송년회라고 세 명의 여자 동기들도 함께 했다. 너무 오랜만에 만나니 얼굴도 이름도 기억나지 않았다. 길거리에서 만났다면 그냥 스쳐 지나가는 타인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어린 시절을 공유하는 추억으로 인하여 서먹했던 자리는 금방 난로처럼 따뜻해졌다. "나, 오늘 늦어도 돼. 남편한테 허락 받았다구." 단발머리 소녀들이 결혼하고, 아이를 낳아 어머니가 되고, 어느새 손자를 보는 나이까지 되었다. 눈가의 주름과 흰머리를 가릴 수 없듯,..

시읽는기쁨 2009.12.09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슈킨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 힘든 일 참고 견디면 즐거운 날이 오리니 마음은 내일에 사는 것 오늘이 슬프다 해도 모든 것은 한 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지나간 것은 언제나 그리워지는 것이다 -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푸슈킨 옛날 이발소에는 돼지 그림에 이 시의 첫 구절이 적힌 액자가 의례 걸려 있었다. 우리 세대라면 태어나서 가장 먼저, 그리고 가장 많이 접한 시가 이것일 것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 글귀가 러시아 시인이 쓴 유명한 시의 한 부분인 줄 전혀 몰랐다. 푸슈킨이라는 이름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알게 되었다. 그러나 이십대 때는 이 시가 왠지 싫었다.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보편성에도 불구하고 너무 값싼 위로를 준다고 여겼는지도 모르겠다. 고민하고 고뇌하던 시기, 그런 가..

시읽는기쁨 2009.12.05

길 / 원혜빈

아주 오래 전 사람이 그리워 헤매던 나그네 짚신 밑에서 태어났다. 이름 모를 꽃과 풀을 밀어내며 나는 자랐다. 햇살과 바람에 몸을 내주면 되었다. 많은 것들이 나를 밟기 시작했다. 그 속에서 몸살을 앓으며 상처를 키웠다. 슬픔은 잡초처럼 자라났고 상처는 굳은살이 되어 박혔다. 수많은 사람들이 나를 지나갔다. 더러는 혼자였고 더러는 여럿이었다. 만나고 헤어지고 헤어지고 만나는. 그들은 웃고 울며 그리워했다. 나는 그저 묵묵히 그들의 말을 들어주었다. 시간이 흐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사라졌다. 다시 나는 혼자가 되었다. 가끔 지나는 산새만이 나를 알아주었다. 내 어깨에 뿌리내린 소나무만이 나를 알아주었다. 서로 엉켜있는 풀들만이 나를 알아주었다. 시간이 계속 흐른다. 누군가 나를 찾아왔다. 곧 많은 사람들..

시읽는기쁨 2009.12.01

친구가 / 이시카와 도쿠보쿠

친구가 모두 훌륭해 보이는 날엔 꽃 사들고 돌아와 아내와 즐겼노라 이시카와 도쿠보쿠(1886-1912). 26세로 요절한 천재 시인. 짧은 생애동안 세상과 불화하고 가난에 시달리다 폐결핵으로 죽은 불행한 시인. 시인은 요즈음 말로 하면 ‘루저’라고 불렸을까? 아내마저 생활고로 집을 나간 뒤 시인은 자살을 결심하기도 한다. 불행하게도 어머니와 아내 역시 시인과 비슷한 시기에 폐결핵으로 사망하고, 남은 두 딸도 어린 나이에 모두 폐결핵으로 죽는다. 이 시에서는 고단한 현실을 초월하려는 자족의 경지가 엿보이기도 하지만 어쩐지 인생의 본원적인 슬픔 같은 게 느껴진다. 승화된 정신만으로는 이겨내기 힘든 현실의 벽 같은 것. 이시카와는 짧은 단가(短歌)에서 뛰어난 작품을 남긴 일본의 국민시인이다. 시인 백석(白石)..

시읽는기쁨 2009.11.26

너를 찾는다 / 오세영

바람이라 이름한다.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것들, 무엇이라 호명(呼名)해도 다시는 대답하지 않을 것들을 향해 이제 바람이라 불러본다. 바람이여, 내 귀를 멀게 했던 그 가녀린 음성, 격정의 회오리로 몰아쳐와 내 가슴을 울게 했던 그 젖은 목소리는 지금 어디 있는가. 때로는 산들바람에, 때로는 돌개바람에, 아니 때로는 거친 폭풍에 실려 아득히 지평선을 타고 넘던 너의 적막한 뒷모습 그리고 애잔한 범종(梵鐘)소리, 낙엽소리, 내 귀를 난타하던 피아노 건반, 그 광상곡(狂想曲)의 긴 여운, 어느 먼 변경 척박한 들녘에 뿌리내려 민들레, 쑥부쟁이, 개망초 아니면 씀바귀꽃으로 피어났는가. 말해다오. 강물이라 이름한다. 이미 잊혀진 것들, 그래서 무엇이라 아예 호명조차 할 수 없는 것들을 향해 이제 강물이라 불러본다...

시읽는기쁨 2009.11.21

학교 / 조성순

제일의 아이가 가방을 메고 등교한다. 제이의 아이가 가방을 메고 등교한다. 제삼의 아이가 가방을 메고 등교한다. 제사의 아이가 가방을 메고 등교한다. 제오의 아이가 가방을 메고 등교한다. 제육의 아이가 가방을 메고 등교한다. 제칠의 아이가 가방을 메고 등교한다. 제팔의 아이가 가방을 메고 등교한다. 제구의 아이가 가방을 메고 등교한다. 교문 밖 울타리에 줄장미가 대낮같이 환하게 웃고 있다. 한 아이도 그 웃음소리 듣지 못한다. - 학교 / 조성순 조성순 시인은 우리 히말라야 팀의 일원이다. 지난 겨울에는 함께 랑탕 트레킹도 다녀왔고, 또한 국내 산행에서도 자주 만난다. 시를 좋아하면 자연히 시인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된다. 아주 예전에는 시인이란 이슬만 먹고 사는 줄 알았다. 지금은 시인 역시 별난 사람..

시읽는기쁨 2009.11.15

서울의 예수 / 정호승

1. 예수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한강에 앉아 있다. 강변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예수가 젖은 옷을 말리고 있다. 들풀들이 날마다 인간의 칼에 찔려 쓰러지고 풀의 꽃과 같은 인간의 꽃 한 송이 피었다 지는데, 인간이 아름다워지는 것을 보기 위하여, 예수가 겨울비에 젖으며 서대문 구치소 담벼락에 기대어 울고 있다. 2. 술 취한 저녁, 지평선 너머로 예수의 긴 그림자가 넘어간다. 인생의 찬밥 한 그릇 얻어먹은 예수의 등 뒤로 재빨리 초승달 하나 떠오른다. 고통 속에 넘치는 평화, 눈물 속에 그리운 자유는 있었을까. 서울의 빵과 사랑과, 서울의 빵과 눈물을 생각하며 예수가 홀로 담배를 피운다. 사람의 이슬로 사라지는 사람을 보며 , 사람들이 모래를 씹으며 잠드는 밤, 낙엽들은 떠나기 위하여 서울에 잠시 머물고 예수..

시읽는기쁨 2009.11.09

가을날 / 릴케

주여, 때가 왔습니다. 지난 여름은 참으로 길었습니다. 해시계 위에 당신의 그림자를 얹으십시오. 들에다 많은 바람을 놓으십시오. 마지막 과실들을 익게 하시고, 이틀만 더 남국의 햇빛을 주시어 그들을 완성시켜, 마지막 단맛이 짙은 포도주 속에 스미게 하십시오. 지금 집이 없는 사람은 이제 집을 짓지 않습니다. 지금 고독한 사람은 이후로도 오래 고독하게 살아 잠자지 않고, 읽고, 그리고 긴 편지를 쓸 것입니다. 바람에 불려 나뭇잎이 날릴 때, 불안스러이 이러저리 가로수 길을 헤맬 것입니다. - 가을날 / R. M. Rilke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 이름을 가만히 속삭이는 것만으로도 시심(詩心)이 저절로 샘솟지 않는가. 릴케야말로 가장 시인다운 이름을 가진 시인이라고 생각된다. 그저 그가 좋았던 건 순전히 ..

시읽는기쁨 2009.11.05

열애 / 이수익

때로 사랑은 흘낏 곁눈질도 하고 싶지. 남몰래 외도(外道)도 즐기고 싶지. 어찌 그리 평생 붙박이 사랑으로 살아갈 수 있나. 마주 서 있음만으로도 그윽이 바라보는 눈길만으로도 저리 마음 들뜨고 온몸 달아올라 절로 열매 맺는 나무여, 나무여, 은행나무여. 가을부터 내년 봄 올 때까지 추운 겨울 내내 서로 눈 감고 돌아서 있을 동안 보고픈 마음일랑 어찌 하느냐고 네 노란 연애편지 같은 잎사귀들만 마구 뿌려대는 아, 지금은 가을이다. 그래, 네 눈물이다. - 열애 / 이수익 암수가 딴그루인 나무들이 많이 있지만 시인들이 유독 은행나무 사랑을 노래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시인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마찬가지다. 학창 시절에 노란 은행잎을 책갈피에 끼워두었다가 편지를 쓸 때면 함께 보내곤 했던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시읽는기쁨 2009.10.31

지구 신발 / 함민복

너 지구 신발 신어 봤니? 맨발로 뻘에 한번 들어가 봐 말랑말랑한 뻘이 간질간질 발가락 사이로 스며들며 금방 발에 딱 맞는 신발 한 켤레가 된다 그게 지구 신발이야 지구 신발은 까칠까칠 칠게 발에도 낭창낭창 도요새 발에도 보들보들 아이들 발에도 우락부락 어른들 발에도 다 딱 맞아 지구 신발 한번 꼭 신어보렴 - 지구 신발 / 함민복 EBS의 '세계테마기행'을 즐겨 보고 있다. 지난 주에는 알래스카편이 방송되었다. 북극권의 아름답고 이색적인 풍광이 인상적이었지만 자연을 아끼고 지키려는 사람들의 마음이더 감동이었다. 국립공원에는 탐방객 수를 제한하고 지정 차량 외에는 운행도 금지한다. 원래 주인인 동물들을 지키고 자연 파괴를 막기 위함이다.그들의 관점에서는 인간이불편을 감수해야 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시읽는기쁨 2009.10.26

조개의 깊이 / 김광규

결혼을 한 뒤 그녀는 한 번도 자기의 첫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도 물론 자기의 비밀을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렇잖아도 삶은 살아갈수록 커다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환멸을 짐짓 감추기 위하여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을 했지만, 끝내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환멸은 납가루처럼 몸속에 쌓이고, 하지 못한 말은 가슴속에서 암세포로 굳어졌다. 환멸은 어쩔 수 없어도, 말은 언제나 하고 싶었다. 누구에겐가 마음속을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마음 놓고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말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다가 그런 구절이 발견되면 반가워서 밑줄을 긋기도 했고, 말보다 더 분명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

시읽는기쁨 2009.1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