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조개의 깊이 / 김광규

샌. 2009. 10. 20. 10:28

결혼을 한 뒤 그녀는 한 번도 자기의 첫사랑을 고백하지 않았다. 그녀의 남편도 물론 자기의 비밀을 말해 본 적이 없다. 그렇잖아도 삶은 살아갈수록 커다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환멸을 짐짓 감추기 위하여 그들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말을 했지만, 끝내 하지 않은 말도 있었다.

환멸은 납가루처럼 몸속에 쌓이고, 하지 못한 말은 가슴속에서 암세포로 굳어졌다.


환멸은 어쩔 수 없어도, 말은 언제나 하고 싶었다. 누구에겐가 마음속을 모두 털어놓고 싶었다. 아무도 기억해 주지 않는다면, 마음 놓고 긴 이야기를 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때로는 다른 사람이 비슷한 말을 해주는 경우도 있었다. 책을 읽다가 그런 구절이 발견되면 반가워서 밑줄을 긋기도 했고, 말보다 더 분명한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했다. 그러나 끝까지 자기의 입은 조개처럼 다물고 있었다.


오랜 세월을 끝없는 환멸 속에서 살다가 끝끝내 자기의 비밀을 간직한 채 그들은 죽었다. 그들이 침묵한 만큼 역사는 가려지고 진리는 숨겨진 셈이다. 그리하여 오늘도 우리는 그들의 삶을 되풀이하면서 그 감춰진 깊이를 가늠해 보고, 이 세상은 한번쯤 살아 볼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 조개의 깊이 / 김광규


그저께 본 영화 ‘날아라 펭귄’은 사람들 사이의 소통 부재에 관한 내용을 다루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소통 부재의 최일선이 바로 가정이 아닌가 싶다. 영화에서 그려지듯이 여자들은 대개 가족이데올로기에 매몰되어 있고, 남자들은 현실과 유리된 채 철딱서니 없는 행동을 한다. 상대에 대한 이해나 배려는 찾아보기 어렵다. 부부 사이에, 부모와 자식 사이에, 진정한 의미의 소통이 이루어지는 집이 얼마나 될까? 가족이라는 끈적끈적한 관계가 도리어 간섭, 소유, 기대, 구속, 억압, 의무 같은 부정적 개념들을 생산해 내는 공장이 된다. 새로운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이 전통적 가족 개념에서 탈피한 새로운 관계망을 모색해 보는 것은 일리가 있는 일로 보인다.


과연 하지 못하고 있는 말이 첫사랑밖에 없을까? 서로가 엄청 많은 말을 나누지만 그것이 껍데기 말밖에 되지 않음을 느낄 때면 외롭고 쓸쓸해진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말 못하는 그 무엇이 있음으로 인하여 조개 속에서는 진주가 자란다. 소통 부재는 어쩌면 인간 존재의 숙명인지도 모른다. 상대방의 내면세계에 깊숙이 들어가면 갈수록 우리는 공허를 맛본다. 그것이야말로 나를 드러내거나 상대를 속속들이 알려는 것이 꺼려지는 이유인지도 모른다. 하나가 되고 싶지만 결코 하나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두려움이다.


'삶은 살아갈수록 커다란 환멸에 지나지 않았다' - 삶은 환멸일지라도 그래도 살아 볼 가치가 있다고 믿으며 우리는 살아간다. 그리고 이 쳇바퀴 같이 되풀이되는 삶이 어떤 때는 아름답고 눈물겹게 느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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