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바보 이력서 / 임보

샌. 2010. 1. 31. 18:05

친구들은 명예와 돈을 미리 내다보고

법과대학에 들어가려 혈안일 때에

나는 영원과 아름다움을 꿈꾸며

어리석게 문과대학을 지원했다

 

남들은 명문세가를 좇아

배우자를 물색하고 있을 때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어렵게 자란

현모양처를 구했다

 

이웃들은 새로운 터전을 찾아 강을 넘어

남으로 갔을 때

나는 산을 떨치지 못해 추운 북녘에서

반평생을 보냈다

 

사람들은 땅을 사서 값진 과목들을 심을 때

나는 책을 사서 몇 줄의 시를 썼다

 

세상을 보는 내 눈은 항상 더디고

사물을 향한 내 예감은 늘 빗나갔다

 

그래서 한평생 내가 누린 건 무명과 빈곤이지만

그래서 또한 내가 얻은 건 자유와 평온이다

 

- 바보 이력서 / 임보

 

행인지 불행인지 지금까지 이력서란 걸 거의 써보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면서 자동으로 취직이 되었고, 그 뒤로는 전직을 시도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요즈음 젊은이들 같으면 수십 장의 이력서를 쓰는 게 기본이라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나 같이 이력서를 못 썼다는 것은 무능함의 다른 이름과 같다.

 

앞으로도 살아서 이력서를 쓸 일은 없겠지만 나중에 죽어서 신 앞에 서게 될 때는 지상에서 살았던 이력서를 제출해야 할지도 모른다. 만약 그렇다면 조금은 부끄러워질 것 같다. 열심히 살지도 못했고 제대로 이루어놓은 것도 없으니 내 이력서는 별 내용도 없이 빈칸 투성이일 게 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이 보는 눈은 다를지도 모른다는 게 내 위안이다. 땅에서 큰 자가 하늘에서는 작고, 땅에서 작은 자가 하늘에서는 크다는 말을 어디선가 주워듣기도 했다. 그렇다면 세상 기준으로 볼 때는 바보 같이 살라는 말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시인의 '바보 이력서'라는 제목은 사실은 '현자 이력서'가 맞을 것이다. 따라서 좀더 바보 같이 살지 못한 걸 자책해야 나는 마땅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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