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폭설 / 오탁번

샌. 2010. 1. 17. 08:46

삼동(三冬)에도 웬만해선 눈이 내리지 않는

남도(南道) 땅끝 외진 동네에

어느 해 겨울 엄청난 폭설이 내렸다

이장이 허둥지둥 마이크를 잡았다

- 주민 여러분! 삽 들고 회관 앞으로 모이쇼잉!

눈이 좆나게 내려부렸당께!

 

이튿날 아침 눈을 뜨니

간밤에 또 자가웃 폭설이 내려

비닐하우스가 몽땅 무너져내렸다

놀란 이장이 허겁지겁 마이크를 잡았다

- 워메, 지랄나부렀소잉!

어제 온 눈은 좆도 아닝께 싸게싸게 나오쇼잉!

 

왼종일 눈을 치우느라고

깡그리 녹초가 된 주민들은

회관에 모여 삼겹살에 소주를 마셨다

그날 밤 집집마다 모과빛 장지문에는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다음날 새벽 잠에서 깬 이장이

밖을 내다보다가, 앗!, 소리쳤다

우편함과 문패만 빼꼼하게 보일 뿐

온 천지(天地)가 흰눈으로 뒤덮여 있었다

하느님이 행성(行星)만한 떡시루를 뒤엎은 듯

축사 지붕도 폭삭 무너져내렸다

 

좆심 뚝심 다 좋은 이장은

윗목에 놓인 뒷물대야를 내동댕이치며

우주(宇宙)의 미아(迷兒)가 된 듯 울부짖었다

- 주민 여러분! 워따, 귀신 곡하겠당께!

인자 우리 동네 몽땅 좆돼버렸쇼잉!

 

- 폭설(暴雪) / 오탁번

 

"동민 여러분께 알립니다." 고향 마을의 정적을 깨는 스피커 소리가 울린다. 앞 부분에는 의례 구성진 유행가가 한참을 나온다. 이번에는 '왜 사람들은 고향을 버릴까'라는 구절이 들어 있는 노래다. 우리나라 어느 마을을 가든 이 스피커 소리는 이제 고향을 상징하는 소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들렸는데 이젠 정답기까지 하다. 거기에는 구수한 사투리가 한 몫을 함에 틀림 없다. 특히 동장님의 어눌한 목소리가 보태져야 그 맛이 더해진다.

 

무척 재미있는 시다. '좆'이라는 말은 시에서나 일상에서나 금기어인데 이 시에서는 절로 입가에 미소를 띄게 만든다. 같은 말이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욕도 되고 유머러스한 은유도 된다. 좀 더 강한 '거시기'라고 할까. 그리고 '뒷물하는 아낙네의 실루엣이 비쳤다' - 이 시의 백미가 되는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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