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국도 / 윤제림

샌. 2010. 1. 27. 08:44

버스 뒤에

레미콘 트럭,

트럭 뒤에

소나타,

소나타 뒤에

경운기,

경운기 뒤에

 

세상에서 가장 느린 탈것 하나가 세상 모든 탈것들을 줄줄이 멈춰 세웠습니다. 느릿느릿 길을 건너 산길로 접어든 꽃상여 하나, 찻길을 막아놓고서는 제 자신도 솔밭머리에서 제자리걸음입니다.

 

시동을 끄고 내려서 담배를 피워 무는 버스 기사를 보고 레미콘 트럭이 경적을 울려댑니다. 그 소리에 놀란 깃발과 사람들이 길 양편으로 흘러내립니다.

 

버스 기사가 차에 오릅니다. 차창 밖을 내다보던 새댁 하나가 품에 안은 아이 손을 붙잡고 빠이빠이를 합니다. 멈췄던 차들이 가던 길을 갑니다.

 

버스 뒤에

레미콘 트럭,

트럭 뒤에

소나타,

소나타 뒤에

경운기,

경운기 뒤에

코란도,

 

- 국도 / 윤제림

 

 

"비스타리 비스타리", 4000 m 높이의 히말라야 산길을 걸을 때 뒤따르던 네팔인 가이드가 연신 주의를 주었다. 우리말로는 "천천히 천천히"라는 뜻이다. 히말라야 트레킹에서는 천천히 걷는 사람이 가장 높이 오를 수 있다. 빨리 걷다가는 고소증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빨리 빨리'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비스타리 비스타리'는 색다른 경험이었다.

 

산업사회에 들어서면서 느릿느릿 문화는 사라졌다. 사람들은 몸도 마음도 무엇에 쫓기듯 조바심을 친다. 우리가 낙원에서 추방된 것은 조급증 때문이라고 카프카는 말했다. 시에서처럼 결국은 가장 느린 탈것에 누울 것이면서 무엇에 그리 바쁜지 종종걸음을 친다. 그러면서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

 

이석원의 산문집에서 이런 구절을 보았다.

 

도로에서 가장 느리게 달리는 차는 항상 나다. 그래서 내 뒤에 오는 차들은 거의 어김없이 클랙슨을 누르며 답답해하다가 쌩, 하고 추월을 하곤 한다.

'너네는 좋겠다. 그렇게 급한 일, 중요한 일, 가치 있는 일이 있어서. 그렇게 미친 듯이 가야할 곳이 있어서.'

오늘도 나는 가장 느리게 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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