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0

조장 / 김선태

티베트 드넓은 평원에 가서 사십 대 여인의 장례를 지켜보았다. 라마승이 내장을 꺼내어 언저리에 뿌리자 수십 마리의 독수리들이 달겨들더니 삽시에 머리카락과 앙상한 뼈만 남았다, 다시 쇠망치로 뼈를 부수어 밀보리와 반죽한 것을 독수리들이 깨끗이 먹어치웠다, 잠깐이었다. 포식한 독수리들이 하늘로 날아오르자 의식은 끝났다, 그렇게 여인은 허, 공에 묻혔다 독수리의 몸은 무덤이었다 여인의 영혼은 무거운 육신의 옷을 벗고 하늘로 돌아갔다, 독수리의 날개를 빌어 타고 처음으로 하늘을 훨훨 날 수 있었을 게다. 장례를 마치고 마을로 돌아가는 유족들은 울지 않았다, 침울하지 않았다, 평온했다 대퇴골로 피리를 만들어 불던 스님의 표정도 경건했다, 믿기지 않았다, 그들은 살아생전 못된 놈의 시신은 독수리들도 먹지 않는다고 ..

시읽는기쁨 2009.06.05

묵념 5분 27초 / 황지우

- 묵념 5분 27초 / 황지우 제목만 있고 내용이 없다. 아마 세계에서 가장 짧은 시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많은 얘기를 한다. 침묵이 웅변보다 더 많은 걸 말할 때가 있다. 여기서 '5분 27초'는 광주항쟁에서 전남도청이 계엄군에 의해 유혈 진압된 5월 27일을 의미한다. 우연히도 그날 즈음인 오늘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열렸다. 광주의 죽음과 노무현의 죽음에는 공통된 원인자가 있다. 그 거대한 뿌리를 직시하고 분노해야 할 때다. 건망증 환자처럼 시간이 흐른다고 다시 잊어서는 안 된다. 노 대통령은작은 비석 하나를 세워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 비석의 비문을 황지우 시인이 쓴다고 한다. 작은 비석에 들어가는 작은 문장이 어떻게 나타날지 궁금하다. 이 시처럼 아무 말이 없는 침묵도 한 방법이 아닐까...

시읽는기쁨 2009.05.29

늙어가는 아내에게 / 황지우

내가 말했잖아. 정말, 정말, 사랑하는, 사랑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들은, 너, 나 사랑해? 묻질 않어 그냥, 그래, 그냥 살아 그냥 서로를 사는 게야 말하지 않고, 확인하려 하지 않고, 그냥 그대 눈에 낀 눈꼽을 훔치거나 그대 웃깃의 솔밥이 뜯어주고 싶게 유난히 커보이는 게야 생각나? 지금으로부터 14년 전, 늦가을, 낡은 목조 적산 가옥이 많던 동네의 어둑어둑한 기슭, 높은 축대가 있었고, 흐린 가로등이 있었고 그 너머 잎 내리는 잡목 숲이 있었고 그대의 집, 대문 앞에선 이 세상에서 가장 쓸쓸한 바람이 불었고 머리카락보다 더 가벼운 젊음을 만나고 들어가는 그대는 내 어깨 위의 비듬을 털어주었지 그런거야, 서로를 오래오래 그냥, 보게 하는 거 그리고 내가 많이 아프던 날 그대가 와서, 참으로 하..

시읽는기쁨 2009.05.25

깃발 / 유치환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여 흔드는 영원한 노스탤지어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달픈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 깃발 / 유치환 거센 바람에 펄럭이는 깃발을 보고 두 스님이 논쟁을 하고 있었다. 한 스님은 바람이 움직이는 것이라 했고, 다른 스님은 깃발이 움직이는 것이라 했다. 이에 육조 혜능선사가 말했다. "바람이 윰직이는 것도,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 무엇이 움직인다는 말입니까?"혜능이 답했다. "두 사람 마음이 움직이는 것입니다." 시인이 본 깃발이나 혜능선사가 본 깃발이나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펄럭이는 깃발에서 마음을 읽은 것이..

시읽는기쁨 2009.05.20

아버지의 그늘 / 신경림

툭하면 아버지는 오밤중에 취해서 널브러진 색시를 업고 들어왔다, 어머니는 입을 꾹 다문 채 술국을 끓이고 할머니는 집안이 망했다고 종주먹질을 해댔지만, 며칠이고 집에서 빠져나가지 않는 값싼 향수내가 나는 싫었다 아버지는 종종 장바닥에서 품삯을 못 받은 광부들한테 멱살을 잡히기도 하고, 그들과 어울려 핫바지춤을 추기도 했다, 빚 받으러 와 사랑방에 죽치고앉아 내게 술과 담배 심부름을 시키는 화약장수도 있었다. 아버지를 증오하면서 나는 자랐다, 아버지가 하는 일은 결코 하지 않겠노라고 이것이 내 평생의 좌우명이 되었다, 나는 빚을 질 일을 하지 않았다, 취한 색시를 업고 다니지 않았고, 노름으로 밤을 지새지 않았다, 아버지는 이런 아들이 오히려 장하다 했고 나는 기고만장했다, 그리고 이제 나도 아버지가 중풍..

시읽는기쁨 2009.05.13

엄마 걱정 / 기형도

열무 삼십단을 이고 시장에 간 우리 엄마 안 오시네, 해는 시든 지 오래 나는 찬밥처럼 방에 담겨 아무리 천천히 숙제를 해도 엄마 안 오시네, 배춧잎 같은 발소리 타박타박 안 들리네, 어둡고 무서워 금간 창 틈으로 고요히 빗소리 빈방에 혼자 엎드려 훌쩍거리던 아주 먼 옛날 지금도 내 눈시울을 뜨겁게 하는 그 시절, 내 유년의 윗목 - 엄마 걱정 / 기형도 어버이날에도 고향에 홀로 계신 어머니 찾아뵙지 못했다. 전화를 드리니 괜찮다, 괜찮다 하신다. 그 말에 더욱 마음이 무겁다. 자식 노릇 하나 제대로 못하는 주제에 고담준론이나 일삼는 내 자신이 슬프다. 옛말에 공부시킨 자식이 불효한다는 말이 있는데 딱 그런 것 같다. 어머니, 죄송합니다.... 내 마음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윗목이다.

시읽는기쁨 2009.05.09

저 못된 것들 / 이재무

저 환장하게 빛나는 햇살 나를 꼬드기네 어깨에 둘러맨 가방 그만 내려놓고 오는 차 아무거나 잡아타라네 저 도화지처럼 푸르고 하얗고 높은 하늘 나를 충동질하네 멀쩡한 아내 버리고 젊은 새 여자 얻어 살림을 차려보라네 저 못된 것들 좀 보소 흐르는 냇물 시켜 가지 밖으로 얼굴 내민 연초록 시켜 지갑 속 명함을 버리라네 기어이 문제아가 되라 하네 - 저 못된 것들 / 이재무 그래, 모든 게 저 못된 것들 때문이야. 배낭 둘러매고 이 산 저 산 헤매이게 하는 것이며, 몇 잔 술에 취해 집에 가기 싫다고 투정을 부리게 되는 것이며, 기어이 눈물을 보이게 하는 철없는 짓이며, 모든 게 저 못된 것들 탓이야. 그러나 이 환장할 봄날에 잠시 문제아가 되어 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 봄의 유혹에 모른 척 빠져보는 것도 ..

시읽는기쁨 2009.05.06

마음 고치려다 / 이명수

널다리 건너 개심사(開心寺)에 갔습니다 산속으로 난 찻길 버리고 세심동(洗心洞) 개심사(開心寺) 입구에서부터 돌계단 108개쯤 밟고 갔습니다 세심(洗心), 개심(開心) 하는 일이 어디 쉬운 노릇입니까 외나무 널다리 건너는 일만큼만 된다면야 밤새 건너고 또 건너겠지만 나이 들면 마음에도 겹겹의 기름때가 들어차 뜻대로 씻어낼 수 없으니 씻을 마음, 고칠 마음 그냥 챙겨 안고 돌아가는 하산길 골 너머 마애삼존불 왜, 날 보고 웃음 흘리십니까 - 마음 고치려다 / 이명수 고향 마을 뒷산에 안심사(安心寺)라는 절이 있었다. 사월 초파일이면 깨끗한 흰 옷으로 갈아입으신 할머니, 일 년에 한 번절에 가셨다. 할머니 따라가던 산길, 잔칫날 같던 절집의 북적거림,우리 꼬마들은 덩달아 신이 나서동무들과 어울리며 하루 종일..

시읽는기쁨 2009.04.30

하늘밥도둑 / 심호택

망나니가 아닐 수야 없지 날개까지 돋친 놈이 멀쩡한 놈이 공연히 남의 집 곡식줄기나 분지르고 다니니 이름도 어디서 순 건달 이름이다만 괜찮다 요샛날은 밥도둑쯤 별것도 아니란다 우리들 한 뜨락의 작은 벗이었으니 땅강아지, 만나면 예처럼 불러주련만 너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거냐? 살아보자고, 우리들 타고난 대로 살아갈 희망은 있다고 그 막막한 아침 모래밭네가 헤쳐갔듯이 나 또한 긴 한세월을 건너왔다만 너는 왜 아무데도 보이지 않는 거냐? 하늘밥도둑아 얼굴 좀 보자 세상에 벼라별 도적놈 각종으로 생겨나서 너는 이제 이름도 꺼내지 못하리 나와보면 안단다 부끄러워 말고 나오너라 - 하늘밥도둑 / 심호택 하늘밥도둑은 땅강아지의 다른 이름이다. 토로래라고도 한다. 동작이 날쌔서 잡으려고 하면 삽처럼 생긴 앞발로 순식간..

시읽는기쁨 2009.04.26

마지막 뉴스 / 서정홍

시청자 여러분!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지금 막 들어온 긴급 뉴스를 알려드리겠습니다. 차마 고향을 버리지 못하고 농사짓고 살아가던 몇 안 남은 늙은 농민들이, 농사일 힘에 버거워 자기 먹을 농사만 짓기로 결의하고 파업을 한 지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그래도 사람들은 큰 걱정을 하지 않았습니다. 왜냐면 돈이 있기 때문입니다. 돈만 있으면 수입 농산물을 얼마든지 사 먹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설마 설마 했던 일이 현실로 다가왔습니다. 한국 농민뿐만 아니라 중국, 미국, 인도, 칠레, 세계 모든 농민들이 파업에 동참하는 바람에 마구 들어오던 수입 농산물마저 완전히 끊겨 버렸습니다. 지금 전 세계, 모든 도시는 거의 먹고살기 위한 전쟁터로 변했습니다. 사람들은 굶주린 배를 움켜쥐고 대도시 큰 상점뿐만..

시읽는기쁨 2009.04.23

살그머니 / 강은교

비 한 방울 또르르르 나뭇잎의 푸른 옷 속으로 살그머니 들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가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도 살그머니 열리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도 살그머니 열리네 햇빛 한 자락 소올소올 나뭇잎의 푸른 줄기세포 속으로 살그머니 걸어가네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쓰다듬네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폭풍에 펄럭펄럭 휘날리는데 나뭇잎의 푸른 가슴살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로 걸어가는데 살그머니 살그머니 빙하를 쓰다듬는데 나뭇잎의 푸른 웃도리, 나뭇잎의 푸른 브롯치, 나뭇잎의 푸른 스카프, 나뭇잎의 푸른 가슴호주머니, 나뭇잎의 푸른 피톨들을 살그머니 살그머니 살그머니 감싸안는데 살그머니 너의 속살을 벗기고 가슴호주머니를 만지니, 살그머니 열..

시읽는기쁨 2009.04.21

걸림돌 / 공광규

잘 아는 스님께 행자 하나를 들이라 했더니 지옥 하나를 더 두는 거라며 마다하신다 석가도 자신의 자식이 수행에 장애가 된다며 아들 이름을 아예 '장애'라고 짓지 않았던가 우리 어머니는 또 어떻게 말씀하셨나 인생이 안 풀려 술 취한 아버지와 싸울 때마다 "자식이 원수여! 원수여!" 소리치지 않으셨던가 밖에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것도 중소기업 하나 경영하는 것만큼이나 어렵다고 한다 누구를 들이고 둔다는 것이 그럴 것 같다 오늘 저녁에 덜 되먹은 후배 놈 하나가 처자식이 걸림돌이라고 푸념하며 돌아갔다 나는 "못난 놈! 못난 놈!" 훈계하며 술을 사 주었다 걸림돌은 세상에 걸쳐 사는 좋은 핑계거리일 것이다 걸림돌이 없다면 인생의 안주도 추억도 빈약하고 나도 이미 저 아래로 떠내려가고 말았을 것이다 - 걸림..

시읽는기쁨 2009.04.15

대책 없는 봄 / 임영조

무엇이나 오래 들면 무겁겠지요 앞뜰의 목련이 애써 켜든 연등을 간밤엔 죄다 땅바닥에 던졌더군요 고작 사나흘 들고도 지루했던지 파업하듯 일제히 손을 털었더군요 막상 손 털고 나니 심심했던지 가늘고 긴 팔을 높이 뻗어서 저런! 하느님의 괴춤을 냅다 잡아챕니다 파랗게 질려 난처하신 하느님 나는 터지려는 웃음을 꾹 참았지만 마을 온통 웃음소리 낭자합니다 들불 같은 소문까지 세상에 번져 바야흐로 낯 뜨거운 시절입니다 누구 짓일까, 거명해서 무엇하지만 맨 처음 발설한 것은 매화년이고 진달래 복숭아꽃 살구꽃이 덩달아 희희낙낙 나불댄 게 아니겠어요 싹수 노란 민들레가 망보는 뒤꼍 자꾸만 수상쩍어 가보니 이런! 겁없이 멋대로 발랑까진 십대들 냉이 꽃다지 제비꽃 환하더군요 몰래 숨어 꼬나문 담뱃불처럼 참 발칙하고 앙증맞은..

시읽는기쁨 2009.04.09

혼자 가는 먼 집 / 허수경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요, 그래서 불러 봅니다 킥킥거리며 한때 적요로움의 울음이 있었던 때, 한 슬픔이 문을 닫으면 또 한 슬픔이 문을 여는 것을 이만큼 살아옴의 상처에 기대, 나 킥킥...., 당신을 부릅니다 단풍의 손바닥, 은행의 두 갈래 그리고 합침 저 개망초의 시름, 밟힌 풀의 흙으로 돌아감 당신...., 킥킥거리며 세월에 대해 혹은 사랑과 상처, 상처의 몸이 나에게 기대와 저를 부빌 때 당신...., 그대라는 자연의 달과 별...., 킥킥거리며 당신이라고...., 금방 울 것 같은 사내의 아름다움 그 아름다움에 기대 마음의 무덤에 나 벌초하러 진설 음식도 없이 맨 술 한 병 차고 병자처럼, 그러나 치병과 환후는 각각 따로인 것을 킥킥 당신 이쁜 당신...., 당신이라는 말 참 좋지..

시읽는기쁨 2009.04.04

약탕관에 흐르는 눈물 / 고정희

섬이라면 주야로 배 저어가고 산이라면 봉이마다 오르는 길 있으련만 사랑의 길눈 어두운 나는 그대에게 가는 길 아직 찾지 못하였습니다. 천하 명금 이마지가 거문고를 타고 허오가 자지러지게 피리를 분들 노심초사 그대 생각뿐인 내 마음 즐겁지 않으니 영명한 한의사는 내게 사랑의 묘약 한 재 지어주며 사랑의 길눈 밝아지랍니다. 지은 정성 달이는 정성 마시는 정성으루다 사랑의 길눈 밝아져서 그대 나라에 잘 들어가랍니다. 용한 한의사의 처방대로 햇빛 쨍쨍하고 산들바람 부는 날 받아 사랑의 묘약 달이기를 합니다. 진흙으로 빚은 약탕관에 천년설봉 얼음 녹여 사랑의 묘약 털어넣은 후 하루 스물네 시간에 돋은 그리움 썰어넣고 스무 날 우거진 오매불망 구엽초도 비벼넣고 석 달 열흘 무성한 그리움 잘라넣고 삼 년 묵은 섭섭함..

시읽는기쁨 2009.03.31

사무원 / 김기택

이른 아침 6시부터 밤 10시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그는 의자 고행을 했다고 한다. 제일 먼저 출근하여 제일 늦게 퇴근할 때까지 그는자기 책상 자기 의자에만 앉아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그가 서 있는 모습을 여간해서는 볼 수 없었다고 한다. 점심시간에도 의자에 단단히 붙박여 보리밥과 김치가 든 도시락으로 공양을 마쳤다고 한다. 그가 화장실 가는 것을 처음으로 목격했다는 사람에 의하면 놀랍게도 그의 다리는 의자가 직립한 것처럼 보였다고 한다. 그는 하루종일 損益管理臺帳經과 資金收支心經 속의 숫자를 읊으며 철저히 고행업무 속에만 은둔하였다고 한다. 종소리 북소리 목탁소리로 전화벨이 울리면 수화기에다 자금현황 매출원가 영업이익 재고자산 부실채권 등등을 청아하고 구성지게 염불했다고 한다. 끝없는 수행정진으로 머리는 ..

시읽는기쁨 2009.03.30

인식의 힘 / 최승호

도마뱀의 짧은 다리가 날개 돋힌 도마뱀을 태어나게 한다 - 인식의 힘 / 최승호 '절망한 자는 대담해지는 법이다'라는 니체의 말이 부제로 달린 짧은 경구 같은 시다. 그러나 시의 느낌이 매우 강렬하다. 날개 돋힌 도마뱀은 중생대의익룡을 가리키는 것 같다. 다리가 짧았던 도마뱀은 날쌔고 힘센 공룡에게 쫓기며 대책 없이 무수히 절벽을 뛰어내렸을 것이다. 그런 수천 만 년의 절망이 날개를 돋아나게 했다. 그리고 새의 시조가 되었다. 그런 점에서 절망이야말로 새로운 도약과 혁명의 출발점이다. 만족한 돼지는 우리 밖의 세계를 꿈꾸지 않는다. 친구여, 절망을 두려워 말자. 절망과 도전이 아니었다면이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절망은 희망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시읽는기쁨 2009.03.23

마누라 음식 간보기 / 임보

아내는 새로운 음식을 만들때마다 내 앞에 가져와 한 숟갈 내밀며 간을 보라 한다. 그러면 "음, 마침맞구먼, 맛있네!" 이것이 요즘 내가 터득한 정답이다. 물론, 때로는 좀 간간하기도 하고 좀 싱겁기도 할 때가 없지 않지만- 만일 "좀 간간한 것 같은데" 하면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 나서 "뭣이 간간허요? 밥에다 자시면 딱 쓰것구만!" 하신다. 만일 "좀 삼삼헌디" 하면 또 아내가 한 입 자셔 보고 나서 "짜면 건강에 해롭다요. 싱겁게 드시시오." 하시니 할말이 없다 내가 얼마나 멍청한고? 아내 음식 간 맞추는 데 평생이 걸렸으니 정답은 "참 맛있네!"인데 그 쉬운 것도 모르고.... -마누라 음식 간보기 / 임보 마눌님 눈치 보는 일이 잦아졌다. 나이가 들면서 고개 숙인 남자가 되는 건 자연의 필연 ..

시읽는기쁨 2009.03.18

완행열차 / 허영자

급행열차를 놓친 것은 잘된 일이다 조그만 간이역의 늙은 역무원 바람에 흔들리는 노오란 국화 애틋이 숨어있는 쓸쓸한 아름다움 하마터면 모를 뻔했지 완행열차를 탄 것은 잘된 일이다 서러운 종착역은 어둠에 젖어 거기 항상 기다리고 있거니 천천히 아주 천천히 누비듯이 혹은 홈질하듯이 서두름 없는 인생의 기쁨 하마터면 나는 모를 뻔했지 - 완행열차 / 허영자 고등학교에 입학하면서 서울로 유학을 와서는 고향을 오갈 때면 늘 완행열차를 타고 다녔다. 청량리역에서 출발한 완행열차는 작은 시골역까지 찾아 쉬면서 느릿느릿 달렸다. 지금 감각으로는 달렸다고 하기에도 민망한데 고향까지 가는 데는 거의 7 시간이 걸렸다. 또 마음 착한 완행열차는 교행하는 기차가 있으면 한없이 기다려줄 줄도 알았다. 바깥 풍경을 여유있게 감상하..

시읽는기쁨 2009.03.13

거짓말 / 공광규

대나무는 세월이 갈수록 속을 더 크게 비워가고 오래된 느티나무는 나이를 먹을수록 몸을 썩히며 텅텅 비워간다 혼자 남은 시골 흙집도 텅 비어 있다가 머지않아 쓰러질 것이다 도심에 사는 나는 나이를 먹으면서도 머리에 글자를 구겨 박으려고 애쓴다 살림집 평수를 늘리려고 안간힘을 쓰고 친구를 얻으려고 술집을 전전하고 거시기를 한 번 더 해보려고 정력식품을 찾는다 대나무를 느티나무를 시골집을 사랑한다는 내가 늘 생각하거나 하는 짓이 이렇다 사는 것이 거짓말이다 거짓말인 줄 내가 다 알면서도 이렇게 살고 있다 나를 얼른 패 죽여야 한다 - 거짓말 / 공광규 사람들이 마음속에 숨겨둔 생각들을 모두 다 드러낸다면 어떻게 될까를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남 몰래 짝사랑한 마음, 부끄러운 비밀들, 웃음 뒤에 감추어진 비수들..

시읽는기쁨 2009.03.10

영역 / 신현정

산기슭 집을 샀더니 산이 딸려 왔다 산에 오소리 발자국 나있고 쪽제비가 헤집고 다닌 흔적이 역력하다 제비꽃 붓꽃 산나리 피고 멀리 천국에 사는 아기들이 소풍 와서는 똥을 싸고 갔는지 여기 저기 애기똥풀꽃 피고 떡갈나무는 까치부부가 독채를 들었다 풀섶에선 사마귀들이 덜컥덜컥 턱을 부딪히며 싸우는데 허 나도 질세라 집 있는 데서 오십 보 백 보는 더 걸어나가서 오줌이라도 누고 오고 그러는 것이다 - 영역 / 신현정 영역 다툼은 동물에게만 있는 게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의 의식이나 행동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배경에는 동물적 특징이 잠재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람을 털 없는 원숭이라고 한 재미있는 표현도 있다. 새로 직장을 옮기면서 그런 영역의 문제를 다시 생각해 보게 된다. 자격지심인지 모..

시읽는기쁨 2009.03.06

군무 / 도종환

우포늪에서 무리지어 내려앉는 새떼를 본 적이 있다 분홍빛 발갈퀴를 앞으로 뻗으며 물 위에 내리는 그들의 경쾌한 착지를 물방울들이 박수를 튀기며 환호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을 물든 하늘 한쪽에 점묘를 찍으며 고니떼가 함께 날아오르자 늪 위를 지나가던 바람과 낮은 하늘도 따라 올라가 몇 개의 커다란 곡선을 그리며 가쁜 숨을 내쉬었다 먹고 사는 일이 멀리서 보는 것과 달라서 그리 녹녹한 일은 아니지만 그들의 눈은 맹금류처럼 핏발 서 있지 않았다 솔개나 올빼미가 뜰 때는 주변의 공기도 팽팽하게 긴장을 하고 하늘도 일순 호흡을 멈추며 피 묻은 부리와 살 깊숙이 파고들어간 날카로운 발톱을 주시하는데 물가의 새들은 맹금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말만이 자연의 법칙이라고 믿지 않았다 그들은 어떻게 해야 살아남고 ..

시읽는기쁨 2009.03.01

부부 / 문정희

부부란 무더운 여름밤 멀찍이 잠을 청하다가 어둠 속에서 앵하고 모기 소리가 들리면 순식간에 둘이 합세하여 모기를 잡는 사이이다 너무 많이 짜진 연고를 나누어 바르는 사이이다 남편이 턱에 바르고 남은 밥풀꽃 만한 연고를 손끝에 들고 어디 나머지를 바를 만한 곳이 없나 하고 찾고 있을 때 아내가 주저 없이 치마를 걷고 배꼽 부근을 내어미는 사이이다 그 자리를 문지르며 이 달에 너무 많이 사용한 신용카드와 전기세를 문득 떠올리는 사이이다 결혼은 사랑을 무효화시키는 긴 과정이지만 결혼한 사랑은 사랑이 아니지만 부부란 어떤 이름으로도 잴 수 없는 백 년이 지나도 남는 암각화처럼 그것이 풍화하는 긴 과정과 그 곁에 가뭇없이 피고 지는 풀꽃 더미를 풍경으로 거느린다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를 생각하다가 네가 쥐고 ..

시읽는기쁨 2009.02.23

아지매는 할매 되고 / 허홍구

염매시장 단골술집에서 입담 좋은 선배와 술을 마실 때였다 막걸리 한 주전자 더 시키면 안주 떨어지고 안주 하나 더 시키면 술 떨어지고 이것저것 다 시키다보면 돈 떨어질 테고 그래서 얼굴이 곰보인 주모에게 선배가 수작을 부린다 "아지매, 아지매 서비스 안주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주모가 뭐 그냥 주모가 되었겠는가 묵 한 사발하고 김치 깍두기를 놓으면서 하는 말 "안주 안 주고 잡아먹히는 게 더 낫지만 나 같은 사람을 잡아 먹을라카는 그게 고마워서 오늘 술값은 안 받아도 좋다" 하고 얼굴을 붉혔다 십수 년이 지난 후 다시 그 집을 찾았다 아줌마 집은 할매집으로 바뀌었고 우린 그때의 농담을 다시 늘어놓았다 아지매는 할매 되어 안타깝다는 듯이 "지랄한다 묵을라면 진작 묵지" - 아지매는 할매 되고 / 허홍구 ..

시읽는기쁨 2009.02.18

어떤 채용 통보 / 반칠환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는 저를 채용하신다니 삽자루는 커녕 수저 들 힘도 없는 저를, 셈도 흐리고, 자식도 몰라보는 저를, 빚쟁이인 저를 받아주신다니 출근복도 교통비도, 이발도 말고 면도도 말고 입던 옷 그대로 오시라니 삶이 곧 전과(前過)이므로 이력서 대신 검버섯 같은 별만 달고 가겠습니다 미운 사람도 간다니 미운 마음도 같이 가는지 걱정되지만 사랑하는 사람도 간다니 반갑게 가겠습니다 민들레도 가고 복사꽃도 간다니 목마른 입술만 들고, 배고픈 허기만 들고 허위허위 는실는실 가겠습니다 살아 죄지은 팔목뼈 두개 발목뼈 두개 희디희게 삭은 뼈 네 개쯤 추려 윷가락처럼 던지며 가겠습니다 도면 한 걸음, 모면 깡충깡충 다섯 걸음! 고무신 한 짝 벗어 죄 없는 흙 가려넣어 꽃씨 하나 묻어들고 가겠습니다 - 어떤 채..

시읽는기쁨 2009.02.14

무릎을 잊어버린다 / 엄원태

한동안 무릎은 시큰거리고 아파서 내게 각별한 관심과 사랑을 받아왔다. 아침산책 몇 달 만에 아프지 않게 되자 무릎은 쉽게 잊혀졌다. 어머니는 모시고 사는 우리 부부에게 무관심하고 무뚝뚝하시다. 때로는 잘 삐치시고 짜증까지 내신다. 어머니 보시기에, 우리가 아프지 않은 탓일게다. 아직도 삼시 세 끼를 꼭 챙겨드려야 마지 못한 듯 드신다. 어쩌다 외출이 길어져 늦게 귀가하는 날이면, 그때까지 밥을 굶으시며 아주 시위를 하신다. 어머니는 우리 부부에게 아픈 무릎이다. 그런 어머니에게 안 깨물어도 아픈 손가락이 있다. 아우는 마흔 넘도록 대척지인 아르헨티나로 멕시코로 홀로 떠돌아다닌다. 아우에 대한 어머니의 사랑은 각별하시다. 아우는 어머니의 아픈 무릎이다. - 무릎을 잊어버린다 / 엄원태 누구에게난 아픈 무릎..

시읽는기쁨 2009.02.09

잦은 바람 속의 겨울 감나무를 보면 / 고재종

그 가지들이 가는 것이거나 굵은 것이거나 아예 실가지거나 우듬지거나 모두 다 서로를 훼방놓는 법이 없이 제 숨결 닿는 만큼의 허공을 끌어안고 바르르 떨거나 사운거리거나 건들거리거나 휙휙 후리거나 모두 다 제 깜냥껏 한세상을 흔들거리는데 그 모든 것이 웬만해선 흔들림이 없는 한 집의 주춧기둥 같은 둥치에서 뻗어나간 게 새삼 신기한 일이다. 더더욱 그 실가지 하나에 앉은 조막만한 새 한 마리의 무게가 둥치를 타고 내려가 깜깜한 땅속의 그중 깊이 뻗은 실뿌리에까지 거기 흙살에까지 미쳐 그 무게를 견딜 힘을 다시 우듬지에까지 올려보내는 땅심의 배려로 산 가지는 어느 여린 것 하나라도 어떤 댑바람에도 꺾이지 않는 당참을 보여주는 것이다. 아, 우린 너무 감동을 모르고 살아왔구나! - 잦은 바람 속의 겨울 감나무를..

시읽는기쁨 2009.02.04

히말라야 / 이시영

라다크에서 어느 할아버지는 다람쥐처럼 조르르 지붕에 올라가 비 새는 곳을 수리하고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다리를 타고 내려와 집앞 흔들의자에 앉아 소년처럼 잠시 붉은 얼굴로 타는 노을을 바라보다 그만 저 세상으로 가시었다 사람의 삶이 아직 광활한 자연의 일부였을 때 - 히말라야 / 이시영 히말라야 기슭에 사는 네팔 사람들은 히말라야를 닮았다. 라마 호텔 롯지의 늙은 주인의 얼굴에서도 문명인에게서는 볼 수 없는 인간적 품위와 위엄이 느껴졌다. 물론 라마 호텔은 이름만 호텔이지 겨우 바람만 막는 허술한 숙소였다. 그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마음마저 궁핍한 것은 아니었다. 히말라야 쪽 네팔인들은 티베트에서 넘어온 사람들이 많이 산다. 나이가 든 그들의 모습에서는 자연과 하나가 된 인디언의 풍모가 연상되었다. 사람의..

시읽는기쁨 2009.01.31

도반 / 이성선

벽에 걸어놓은 배낭을 보면 소나무 위에 걸린 구름을 보는 것 같다 배낭을 곁에 두고 살면 삶의 길이 새의 길처럼 가벼워진다 지게 지고 가는 이의 모습이 멀리 노을 진 석양 하늘 속에 무거워도 구름을 배경으로 서 있는 혹은 걸어가는 저 삶이 진짜 아름다움인 줄 왜 이렇게 늦게 알게 되었을까 알고도 애써 모른 척 밀어냈을까 중심 저쪽 멀리 걷는 누구도 큰 구도 안에서 모두 나의 동행자라는 것 그가 또다른 나의 도반이라는 것을 이렇게 늦게 알다니 배낭 질 시간이 많이 남지 않는 지금 - 도반 / 이성선 나도 배낭을 지고 먼 길을 떠난다. 그곳은 꿈속에서만 있었는데 이렇게 현실이 되어 내 앞에 나타났다. 간절히 원하면 언젠가는 꿈이 이루어진다고 했다. 히말라야는 어느 날 그렇게 하늘의 선물처럼 나에게 내려왔다...

시읽는기쁨 2009.01.06

꿈을 비는 마음 / 문익환

개똥 같은 내일이야 꿈 아닌들 안 오리오마는 조개속 보드라운 살 바늘에 찔린 듯한 상처에서 저도 몰래 남도 몰래 자라는 진주 같은 꿈으로 잉태된 내일이야 꿈 아니곤 오는 법이 없다네 그러니 벗들이여! 보름달이 뜨거든 정화수 한 대접 떠 놓고 진주 같은 꿈 한자리 점지해 줍시사고 천지신명께 빌지 않으려나! 벗들이여! 이런 꿈은 어떻겠오? 155마일 휴전선을 해뜨는 동해바다 쪽으로 거슬러 오르다가 오르다가 푸른 바다가 굽어 보이는 산정에 다달아 국군의 피로 뒤범벅이 되었던 북녘땅 한 삽 공산군의 살이 썩은 남녘땅 한 삽씩 떠서 합장을 지내는 꿈, 그 무덤은 우리 5천만 겨레의 순례지가 되겠지 그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다 보면 사팔뜨기가 된 우리의 눈이 제대로 돌아 산이 산으로, 내가 내로, 하늘이 하늘로, 나..

시읽는기쁨 2009.01.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