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1150

토막말 / 정양

가을 바닷가에 누가 써 놓고 간 말 썰물진 모래밭에 한 줄로 쓴 말 글자가 모두 대문짝만해서 하늘에서 읽기가 더 수월할 것 같다 정순아보고자파서죽껏다씨펄 씨펄 근처에 도장 찍힌 발자국이 어지럽다 하늘더러 읽어 달라고 이렇게 크게 썼는가 무슨 막말이 이렇게 대책도 없이 아름다운가 손등에 얼음 조각을 녹이며 견디던 시리디 시린 통증이 문득 몸에 감긴다 둘러보아도 아무도 없는 가을 바다 저만치서 무식한 밀물이 번득이며 온다 바다는 춥고 토막말이 몸에 저리다 얼음 조각처럼 사라질 토막말을 저녁놀이 진저리치며 새겨 읽는다 - 토막말 / 정양 바닷가의 저 막말 앞에서는 나 역시 가슴 저리며 서 있을 것 같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서 좋아하게 되는 불가해한 인연에 대하여, 죽도록 보고 싶어지는 갈망의 자력에 대하여 나..

시읽는기쁨 2008.03.23

나는야 세컨드 1 / 김경미

누구를 만나든 나는 그들의 세컨드다 ,라고 생각하고자 한다 부모든 남편이든 친구든 봄날드라이브 나가자든 자든 여자든 그러니까 나는 저들의 세컨드야, 다짐한다 아니, 강변의 모텔의 주차장 같은 숨겨놓은 우윳빛 살결의 세컨드,가 아니라 그냥 영어로 두 번째, 첫 번째가 아닌, 순수하게 수학적인 세컨드, 그러니까 이번,이 아니라 늘 다음,인 언제나 나중,인 홍길동 같은 서자,인 변방,인 부적합,인 그러니까 결국 꼴찌, 그러니까 세컨드의 법칙을 아시는지 삶이 본처처럼 목 졸라도 결코 목숨 놓지 말 것 일상더러 자고 가라고 애원하지 말 것 적자생존을 믿지 말 것 세컨드, 속에서라야 정직함 비로소 처절하니 진실의 아름다움, 그리움의 흡반, 생의 뇌관은, 가 있게 마련이다 더욱 그곳에 그러므로 자주 새끼손가락을 슬쩍..

시읽는기쁨 2008.03.22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 / 복효근

그걸 내 마음이라 부르면 안되나 토란잎이 간지럽다고 흔들어대면 궁글궁글 투명한 리듬을 빚어내는 물방울의 그 둥근 표정 토란잎이 잠자면 그 배꼽 위에 하늘 빛깔로 함께 자고선 토란잎이 물방울을 털어내기도 전에 먼저 알고 흔적 없어지는 그 자취를 그 마음을 사랑이라 부르면 안되나 - 토란잎에 궁그는 물방울 같이는 / 복효근 맑고 아름답다. 착하고 고운 사람이라면 이런 사랑 할 수 있을까? 인간의 사랑이 이같을 수 있을까? 그러나 우리는 자취 없이, 집착 없이 사랑할 수 없기 때문에 이런 사랑이 그리워 노래하는지도 모른다. 그대가 보고 싶어 하얗게 밤을 새워야 하고, 그대 이름을 부르며 바닷가를 걸어야 한다. 그래서 당신이 털어내기도 전에 미련 없이 떠날 수 없다. 그것을 사랑이라 부를 수 없다고 믿는다. 그..

시읽는기쁨 2008.03.17

명자나무 / 장석주

불행을 질투할 권리를 네게 준 적 없으니 불행의 터럭 하나 건드리지 마라! 불행 앞에서 비굴하지 말 것. 허리를 곧추세울 것. 헤프게 울지 말 것. 울음으로 타인의 동정을 구하지 말 것. 꼭 울어야 한다면 흩날리는 진눈깨비 앞에서 울 것. 외양간이나 마른 우물로 휘몰려가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울 것. 비겁하게 피하지 말 것. 저녁마다 술집들을 순례하지 말 것. 모자를 쓰지 말 것. 콧수염을 기르지 말 것. 딱딱한 씨앗이나 마를 과일을 천천히 씹을 것. 다만 쐐기풀을 견디듯 외로움을 혼자 견딜 것. 쓸쓸히 걷는 습관을 가진 자들은 안다. 불행은 장엄 열반이다. 너도 우니? 울어라, 울음이 견딤의 한 형식이라는 것을, 달의 뒤편에서 명자나무가 자란다는 것을 잊지 마라. - 명자나무 / 장석주 나를 찾아오는 ..

시읽는기쁨 2008.03.13

거꾸로 가는 생 / 김선우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나이 서른에 나는 이미 너무 늙었고 혹은 그렇게 느끼고 나이 마흔에 누이는 가을 낙엽 바스락대는 소리만 들어도 갈래머리 여고생처럼 후르륵 가슴을 쓸어 내리고 예순 넘은 엄마는 병들어 누웠어도 춘삼월만 오면 꽃 질라 아까워라 꽃구경 가자 꽃구경 가자 일곱 살배기 아이처럼 졸라대고 여든에 죽은 할머니는 기저귀 차고 아들 등에 업혀 침 흘리며 잠 들곤 했네 말 배우는 아기처럼 배냇니도 없이 옹알이를 하였네 거꾸로 가는 생은 즐거워라 머리를 거꾸로 처박으며 아기들은 자꾸 태어나고 골목길 걷다 우연히 넘본 키작은 담장 안에선 머리가 하얀 부부가 소꿉을 놀 듯 이렇게 고운 동백을 마당에 심었으니 저 영감 평생 여색이 분분하지 구기자 덩굴 만지작거리며 영감님 흠흠, 웃기만 하고 애증이랄지 ..

시읽는기쁨 2008.03.11

바람의 말 / 마종기

우리가 모두 떠난 뒤 내 영혼이 당신 옆을 스치면 설마라도 봄 나뭇가지 흔드는 바람이라고 생각지는 마 나 오늘 그대 알았던 땅 그림자 한 모서리에 꽃나무 하나 심어 놓으려니 그 나무 자라서 꽃 피우면 우리가 알아서 얻은 모든 괴로움이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릴 거야 꽃잎 되어서 날아가 버린다 참을 수 없게 아득하고 헛된 일이지만 어쩌면 세상 모든 일을 지척의 자로만 재고 살 것인가 가끔 바람 부는 쪽으로 귀 기울이면 착한 당신, 피곤해져도 잊지 마 아득하게 멀리서 오는 바람의 말을 - 바람의 말 / 마종기 세상 살아가는 일이 한 자락 바람처럼 허전하고 아득한 일이다.그러나 그것만은 아니다. 따스하고 눈물겹기도 하다. 우리의 유한함이 유한함으로 인하여 위로 받고, 추억과 그리움이 되어 가슴에 담긴다. 사람을..

시읽는기쁨 2008.03.07

염소와 풀밭 / 신현정

염소가 말뚝에 매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발을 넣고 깨끗한 입을 넣고 몸을 넣고 줄에 매여 멀리 원을 그리는 안쪽은 그의 것 염소가 발을 넣고 뿔을 넣고 그리는 원을 따라 원을 그리는 하늘도 안쪽은 그의 것 그 안쪽을 지나가는 가슴 큰 구름이며, 새들이며 뜯어먹어도 또 자라는 풀은 그의 것, 그러하냐. - 염소와 풀밭 / 신현정 말뚝에 매인 것이 염소만은 아니다. 누구나 이 시를 읽으면 자신을 염소에 대입시키게 된다. 줄의 길고 짧음의 차이는 있지만 우리 모두는 말뚝의 운명을 타고 났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그런 사실을 비관하지 않는다. 도리어 나에게 주어진한정된 범위의 삶을 즐기고 자족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원 안의 풀이 나의 것이듯, 원의 안쪽을 지나가는 구름이며, 새들 또한 나의 즐거움이 ..

시읽는기쁨 2008.03.04

별 헤는 밤 /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헬 듯합니다.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씩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했던 아이들의 이름과, 패, 경, 옥, 이런 이국 소녀들의 이름과, 벌써 아기 어머니 된 계집애들의 이름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이름과,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프란시스 잠', '라이너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이름을 불러 봅..

시읽는기쁨 2008.02.24

뻘물 / 송수권

이 질퍽한 뻘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 아니라 밤꽃 흐드러진 페로몬 냄새 그보다는 뭉클한 이 질퍽한 뻘내음 누가 아나요 아카시아 맑은 향이야 열 몇 살 가슴 두근거리던 때 이야기지만 들찔레 소복이 피어지던 그 언덕에서 나는 비로소 살냄새를 피우기 시작했어요 여자도 낙지발처럼 앵기는 여자가 좋고 그대가 어쩌고 쿡쿡 찌르는 여자가 좋고 하여튼 뻘물이 튀지 않는 꽹과리 장고 소리보단 땅을 메다 치는 징 소리가 좋아요 하늘로는 가지 마.... 하늘로는 가지 마.... 캄캄하게 저물면 뒤늦게 오는땅 울음 그 징 소리가 좋아요 저물다가 저물다가 하늘로는 못 가고 저승까진 죽어 갔다가 밤길에 쏘내기 맞고 찾아드는 계집처럼 새벽을 알리며 뒤늦게 오는 소리가 좋아요 - 뻘물 / 송수권 아련하게 느껴지긴 하지만..

시읽는기쁨 2008.02.20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안도현

어릴 때, 두 손으로 받들고 싶도록 반가운 말은 저녁 무렵 아버지가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정육점에서 돈 주고 사온 것이지마는 칼을 잡고 손수 베어온 것도 아니고 잘라온 것도 아닌데 신문지에 둘둘 말린 그것을 어머니 앞에 툭 던지듯이 내려놓으며 한 마디, 고기 좀 끊어왔다는 말 가장으로서의 자랑도 아니고 허세도 아니고 애정이나 연민 따위 더더구나 아니고 다만 반갑고 고독하고 왠지 시원시원한 어떤 결단 같아서 좋았던, 그 말 남의 집에 세들어 살면서 이웃에 고기 볶는 냄새 퍼져나가 좋을 거 없다, 어머니는 연탄불에 고기를 뒤적이며 말했지 그래서 냄새가 새어나가지 않게 방문을 꼭꼭 닫고 볶은 돼지고기를 씹으며 입 안에 기름 한입 고이던 밤 - 돼지고기 두어 근 끊어왔다는 말 / 안도현 이번에 안도현..

시읽는기쁨 2008.02.13

나의 가난함 / 천상병

나는 볼품없이 가난하지만 인간의 삶에는 부족하지 않다 내 형제들 셋은 부산에서 잘 살지만 형제들 신세는 딱 질색이다 각 문학사에서 날 돌봐주고 몇몇 문인들이 날 도와주고 그러니 나는 불편함을 모른다 다만 하늘에 감사할 뿐이다 이렇게 가난해도 나는 가장 행복을 맛본다 돈과 행복은 상관없다 부자는 바늘귀를 통과해야 한다 - 나의 가난함 / 천상병 올 설날도 가장 자주 들었던 덕담이 "돈 많이 벌어라" "부자 되어라"는 것이었다. 부자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과 같이 어렵다고 했는데, 사람들은 서로 하늘나라에 가지 말라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러면서도 좋아하니 참 묘한 일이다. 하루치의 막걸리와 담배만 있다면 행복하다고 말했던 시인 천상병, 인간이 다다를 수 있는높이 중에서 가난을..

시읽는기쁨 2008.02.10

한 잎의 여자 / 오규원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잎같이 쬐끄만 여자 그 한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잎의 솜털 그 한잎의 맑음 그 한잎의 영혼 그 한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나는 정말로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 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 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누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 한잎의 여자 / 오규원 그저께가 오규원 시인의 1주기였는데, 지인들과 제자들이 모여서 추모식을 가졌다는 보도를 접했다. 어느 분이 추모사에서 시인을 가리켜 '누구..

시읽는기쁨 2008.02.04

한계령을 위한 연가 / 문정희

한겨울 못잊을 사람하고 한계령쯤을 넘다가 뜻밖의 폭설을 만나고 싶다 뉴스는 다투어 수십 년만의 풍요를 알리고 자동차들은 뒤뚱거리며 제 구멍들을 찾아가느라 법석이지만 한계령의 한계에 못 이긴 척 기꺼이 묶였으면 오오, 눈부신 고립 사방이 온통 흰 것뿐인 동화의 나라에 발이 아니라 운명이 묶였으면 이윽고 날이 어두워지며 풍요는 조금씩 공포로 변하고, 현실은 두려움의 색채를 드리우기 시작하지만 헬리콥터가 나타났을 때에도 나는 결코 손을 흔들지는 않으리 헬리콥터가 눈 속에 갇힌 야생조들과 짐승들을 위해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시퍼렇게 살아 있는 젊은 심장을 향해 까아만 포탄을 뿌려대던 헬리콥터들이 고라니나 꿩들의 일용할 양식을 위해 자비롭게 골고루 먹이를 뿌릴 때에도 나는 결코 옷자락을 보이지 않으리 ..

시읽는기쁨 2008.02.03

사랑하지 않는 자는 모두 유죄다 / 노희경

나는 한때 나 자신에 대한 지독한 보호본능에 시달렸다 사랑을 할 땐 더더욱이 그랬다 사랑을 하면서도 나 자신이 빠져나갈 틈을 여지없이 만들었던 것이다 가령 죽도록 사랑한다거나 영원히 사랑한다거나 미치도록 그립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내게 사랑은 쉽게 변질되는 방부제를 넣지 않은 빵과 같고 계절처럼 반드시 퇴색하며 늙은 노인의 하루처럼 지루했다 책임질 수 없는 말은 하지 말자 내가 한 말에 대한 책임 때문에 올가미를 쓸 수도 있다 가볍게 하자 가볍게 보고는 싶지라고 말하고 지금은 사랑해라고 말하고 변할 수도 있다고 끊임없이 상대와 내게 주입시키자 그래서 헤어질 땐 울고불고 말고 깔끔하게, 안녕 나는 그게 옳은 줄 알았다 그것이 상처받지 않고 상처주지 않는 일이라고 진정 믿었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드는 생..

시읽는기쁨 2008.01.31

여우난골族 / 백석

명절날 나는 엄마 아배 따라 우리집 개는 나를 따라 진할머니 진할아버지가 있는 큰집으로 가면 얼굴에 별자국이 솜솜 난 말수와 같이 눈도 껌벅거리는 하루에 베 한 필을 짠다는 벌 하나 건넛집엔 복숭아 나무가 많은 新里 고무 고무의 딸 李女 작은 李女 열여섯에 四十이 넘은 홀아비의 후처가 된 포족족하니 성이 잘 나는 살빛이 매감탕 같은 입술과 젖꼭지는 더 까만 예수쟁이 마을 가까이 사는 土山 고무 고무의 딸 承女 아들 承동이 六十里라고 해서 파랗게 뵈이는 山을 넘어 있다는 해변에서 과부가 된 코끝이 빨간 언제나 흰옷이 정하던 말끝에 설게 눈물을 짤 때가 많은 큰골 고무 고무의 딸 洪女 아들 洪동이 작은 洪동이 배나무접을 잘하는 주정을 하면 토방돌을 뽑는 오리치를 잘 놓는 먼섬에 반디젓 담그러 가기를 좋아하는..

시읽는기쁨 2008.01.29

얼음 호수 / 손세실리아

제 몸의 구멍이란 구멍 차례로 틀어막고 생각까지도 죄다 걸어 닫더니만 결국 자신을 송두리째 염해 버린 호수를 본다 일점 흔들림 없다 요지부동이다 살아온 날들 돌아보니 온통 소요다 중간중간 위태롭기까지 했다 여기 이르는 동안 단 한번이라도 세상으로부터 나를 완벽히 봉(封)해 본 적 있던가 없다. 아루래도 엄살이 심했다 - 얼음 호수 / 손세실리아 겨울에 호수는 제 몸을 얼려 동안거에 들어갔다. 세상과 소통하는 구멍 다 틀어막고 묵언정진 중이시다. 둘레의 나무들 또한 알몸 드러내고 고행을 하고 있다. 부끄럽다....

시읽는기쁨 2008.01.24

입맞춤 / 이영옥

그대와 눈을 감고 입맞춤을 한다면 그것은 내 안에서 일어난 수천 개의 바람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서다 빛나는 계절 뒤에 떼로 몰려오는 너의 허전한 바람을 마중해주는 일이며 빈 가지에 단 한 잎 남아 바르르 떠는 내 마른 울음에 그대가 귀를 대보는 일이다 서로의 늑골 사이에서 적막하게 웅성거리고 있던 외로움을 꼼꼼하게 만져주는 일이며 서로의 텅 빈 마음처럼 외골수로 남아 있던 뭉근한 붉은 살점 한 덩이를 기꺼이 내밀어 보는 일이고 혀 밑에 감춰둔 다른 서러움을 기꺼이 맛보는 일이다 맑은 눈물이 스민 내가 발뒤꿈치를 들고 오래 흔들리고 있었던 그대 뜨거운 삶의 중심부를 가만히 들어 올려주는 일이다 - 입맞춤 / 이영옥 우리는 왜 이렇게 외로우면서 무언가를 그리워하는 것일까? 그 무엇으로도 충족되지 않는 외로움..

시읽는기쁨 2008.01.20

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

시읽는기쁨 2008.01.15

행복 / 유치환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행복 / 유치환 그리스인들은 사랑을 네 종류로 ..

시읽는기쁨 2008.01.08

하나님 놀다 가세요 / 신현정

하나님 거기서 화내며 잔뜩 부어 있지 마세요 오늘따라 뭉게구름 뭉게뭉게 피어오르고 들판은 파랑물이 들고 염소들은 한가로이 풀을 뜯는데 정 그렇다면 하나님 이쪽으로 내려오세요 풀 뜯고 노는 염소들과 섞이세요 염소들의 살랑살랑 나부끼는 거룩한 수염이랑 살랑살랑 나부끼는 뿔이랑 옷 하얗게 입고 어쩌면 하나님 당신하고 하도 닮아서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할 거예요 놀다 가세요 뿔도 서로 부딪치세요 - 하나님 놀다 가세요 / 신현정 염소와 같이 뛰노는 하나님은 생각만 해도 귀엽고 유쾌하다. 아니 하나님은 염소를 닮아 누가 염소인지 하나님인지 구분도 잘 안된다. 하나님은 거대한 성전, 거룩한 의식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 안에 계시고, 그 모든 것이시다. 그러나 귀여운 아..

시읽는기쁨 2008.01.04

설일 / 김남조

겨울 나무와 바람 머리채 긴 바람들은 투명한 빨래처럼 진종일 가지 끝에 걸려 나무도 바람도 혼자가 아닌 게 된다 혼자는 아니다 누구도 혼자는 아니다 나도 아니다 실상 하늘 아래 외톨이로 서 보는 날도 하늘만은 함께 있어 주지 않던가 삶은 언제나 은총(恩寵)의 돌층계의 어디쯤이다 사랑도 매양 섭리(攝理)의 자갈밭의 어디쯤이다 이적진 말로써 풀던 마음 말로써 삭이고 얼마 더 너그러워져서 이 생명을 살자 황송한 축연이라고 알고 한 세상을 누리자 새해의 눈시울이 순수의 얼음꽃 승천한 눈물들이 다시 땅 위에 떨구이는 백설을 담고 온다 - 설일(雪日) / 김남조 2008년 새해 첫날, 이 시를 읽는다. 사실 이젠 해가 바뀌는 것도 무덤덤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이만큼 살다보니그날이 다 그날로 보인다. 인생에 특별한 ..

시읽는기쁨 2008.01.01

여서(女書)를 받고 / 조운

너도 밤마다 꿈에 나를 본다 하니 오고 가는 길에 만날 법도 하건마는 둘이 다 바쁜 마음에 서로 몰라보는가 바람아 부지 마라 눈보라치지 마라 어여쁜 우리 딸의 어리고 고운 꿈이 날 찾아 이 밤을 타고 이백 리를 온단다 - 조운 / 여서(女書)를 받고 어느 날 멀리 떨어져 있는 딸로부터 아버지는 편지를 받는다. 아마 그 편지에는 밤마다 아버지의 꿈만 꾼다는 딸의 애절한 사연이 젹혀 있었을 것이다. 자식의 편지를 받고 그리움과 안타까움에서러운 부정(父情)이 이 시에 잘 묘사되어 있다. 오죽했으면 딸이 찾아오는 꿈자리를 방해하지 말라고 '바람아 부지 마라'고 하며 애원을 할까. 부모와 자식 사이를 천륜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고금에 차이가 없을 것이다. 특히 부모가 자식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야더 말할 나위가..

시읽는기쁨 2007.12.26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에 내가 미리 가 너를 기다리는 동안 다가오는 모든 발자국은 내 가슴에 쿵쿵거린다 바스락거리는 나뭇잎 하나도 다 내게 온다 기다려 본 적이 있는 사람은 안다 세상에서 기다리는 일처럼 가슴 애타는 일 있을까 네가 오기로 한 그 자리, 내가 미리 와 있는 이곳에서 문을 열고 들어오는 모든 사람이 너였다가 너였다가, 너일 것이었다가 다시 문이 닫힌다 사랑하는 이여 오지 않는 너를 기다리며 마침내 나는 너에게 간다 아주 먼데서 나는 너에게 가고 아주 오랜 세월을 다하여 너는 지금 오고 있다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도 가고 있다 남들이 열고 들어오는 문을 통해 내 가슴에 쿵쿵거리는 모든 발자국 따라 너를 기다리는 동안 나는 너에게 가고 있다 - 너를 기다리는 동안 / 황지우 그리워한다는 것은..

시읽는기쁨 2007.12.18

사랑에 답하여 / 정일근

수선화 해를 따라 도는 꽃인 걸 마당에 노란 수선화 피어서 알았다 가녀린 꽃대에 크고 무거운 꽃을 달고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를 따라 간다 달마는 마음 따라 동쪽에서 왔다지만 땅 속에 마음 묻은 수선화의 해바라기는 갈 수 없는 사랑의 지독한 형벌이다, 고 나는 오래전부터 수선화 꽃 뒤에 놓여있는 낡은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나도 그런 아픈 사랑한 적이 있었다, 고 해를 기다리는 말없는 꽃이나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같은 앉음새 같은 가부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란 수선화 지면서 알았다 꽃은 마르면서도 해를 따라 가고 말라 바스라지면서도 저 수선화 뜨거운 해바라기는 멈추지 않았다 수선화 꽃 뒤에 놓아둔 의자도, 사실 누군가를 기다리겠다고 놓아두었지만 의자에 앉아 사람을 기다렸던 시간보다 비어두었던 시간 ..

시읽는기쁨 2007.12.09

I was born / 요시노 히로시

틀림없이 영어를 배우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어느 여름, 아버지와 함께 절 경내를 거닐고 있을 때 푸른 안개 속으로부터 피어 나오듯 하얀 여자가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나른하고도 차분하게 천천히. 여자는 몸이 무거운 것 같았다. 아버지의 눈치를 의식하면서도 나는 여자의 배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머리를 밑으로 향한 태아의 유연한 움직임을 배 언저리에서 연상하면서 그것이 이윽고 이 세상에 태어날 신비로움에 빠져 있었다. 여자는 지나갔다. 소년의 상상은 비약하기 쉽다. 그때 나는 '태어난다'는 것이 확실히 '수동'이라는 이유를 문득 이해했다. 나는 흥분하여 아버지에게 말을 걸었다. - 역시 I was born 이군요. 아버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되풀이했다. - I wa..

시읽는기쁨 2007.12.03

저녁놀 / 요시노 히로시

항상 그렇듯이 전철은 만원이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젊은이와 아가씨가 앉아 있고 노인은 서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가씨가 일어나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허둥지둥 노인이 앉았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노인은 다음 역에서 내렸다 아가씨는 앉았다 다른 노인이 아가씨 앞으로 옆쪽 틈새에서 밀려왔다 아가씨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자리를 그 노인에게 양보했다 노인은 다음 역에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내렸다 아가씨는 앉았다 두 번 일어난 일은 또 일어난다는 말 그대로 다른 노인이 아가씨 앞으로 또 밀려왔다 가엽게도 아가씨는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이번에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다음 역도 그 다음 역도 아랫입술을 꾹 다물고 긴장된 몸은 굳어졌고... 나는 전철에서 내렸다 몸을 힘을 주고 고개를 숙이고 아..

시읽는기쁨 2007.12.01

바람 부는 날이면 / 황인숙

아아 남자들은 모르리 벌판을 뒤흔드는 저 바람 속에 뛰어들면 가슴 위까지 치솟아 오르네 스커트자락의 상쾌! - 바람 부는 날이면 / 황인숙 여자가 되어보고 싶다. 바람 부는 날, 스커트 입고 벌판에 서보고 싶다. 스커트자락이 가슴 위까지 치솟아오를 때 여자만이 느낄 상쾌함을 맛보고 싶다. '상쾌'란 얼마나 멋진 말인가. 그 말 속에는 남자는 죽어도 알아차리지 못할 여자만의 비밀이 숨어있을 것 같다. 여자들의 감성, 여자들이 느끼는 사랑, 여자들에게만 주어진 축복들, 그 내밀한 속마음을 나도 한 번 나의 것으로 느껴보고 싶다.

시읽는기쁨 2007.11.30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

시읽는기쁨 2007.11.26

개에게 인생을 이야기하다 / 정호승

젊을 때는 산을 바라보고 나이가 들면 사막을 바라보라 더 이상 슬픈 눈으로 과거를 바라보지 말고 과거의 어깨를 툭툭 치면서 웃으면서 걸어가라 인생은 언제 어느 순간에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오늘을 어머니를 땅에 묻은 날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첫아기에게 첫젖을 물린 날이라고 생각하라 왜 하필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느냐고 분노하지 말고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아침밥을 준비하라 어떤 이의 운명 앞에서는 신도 어안이 벙벙해질 때가 있다 내가 마시지 않으면 안 되는 잔이 있으면 내가 마셔라 꽃의 향기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듯 바람이 나와 함께 잠들지 않는다고 해서 나를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이 존재하는 일에 감사하는 일일 뿐 내가..

시읽는기쁨 2007.11.21

패밀리 / 정일근

조심해! 자연에도 패밀리가 있다. 이딸리야 마피아나 러시아 마피아와 같은 패밀리가 있다. 자연의 패밀리란 사람의 족보로 치자면 같은 항렬자를 쓰는 형제나 사촌쯤 되는, 그러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의 족보와는 다른, 자연의 인드라망이 있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와 밀림의 왕인 사자는 고양이의 패밀리다. 고양이가 형이고 호랑이와 사자는 아우다. 은현리에 와서 도둑고양이에게 야단을 쳐보라. 달아나기는 커녕 느릿느릿 왕의 걸음걸이로 걸어가며 빤히 쳐다보기까지 하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배경에는 도둑고양이에게 왕이 둘이나 있는 패밀리의 '빽'이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흘레붙는 개에 대해 뜨거운 물을 뿌리며 방해해서는 안된다. 늑대, 은빛여우, 너구리가 개의 패밀리다. 가끔씩 개가 하이톤의 고독한 늑대 울음소리..

시읽는기쁨 2007.11.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