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땐 몰랐다
빈 의자는 누굴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자의 이마가 저렇게 반들반들해진 것을 보게
의자의 다리가 저렇게 흠집 많아진 것을 보게
그땐 그걸 몰랐다
신발들이 저 길을 완성한다는 것을
저 신발의 속가슴을 보게
거무뎅뎅한 그림자 하나 이때껏 거기 쭈그리고 앉아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게
그땐 몰랐다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꽃 속에 꽃이 있는 줄을 몰랐다
일몰의 새떼들, 일출의 목덜미를 핥고 있는 줄을
몰랐다
꽃 밖에 꽃이 있는 줄 알았다
일출의 눈초리는 일몰의 눈초리를 흘기고 있는 줄 알았다
시계 속에 시간이 있는 줄 알았다
희망 속에 희망이 있는 줄 알았다
아, 그때는 그걸 몰랐다
희망은 절망의 희망인 것을
절망의 방에서 나간 희망의 어깻살은
한없이 통통하다는 것을
너를 사랑한다
- 너를 사랑한다 / 강은교
큐피드의 화살을 맞아본 사람은안다. '그땐 몰랐다'는 고백을 하게 될 때가 사랑하는 때라는 것을. 사랑은 그렇게 사람의 시야를 180도로 돌려 놓는 마력이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좋아하는 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다. 사랑은 메말랐던 세상에 반짝이는 의미를 부여해주는 마술과 같다. 사랑은 꽃 속에 있는 꽃을 보게도 하고, 절망으로 보이는 것이 결코 절망이 아님을 알게도 한다.
개인적으로 이 시에서 제일 흥미있는 표현은 '사과의 뺨이 저렇게 빨간 것은 / 바람의 허벅지를 만졌기 때문이라는 것을' 이라는 구절이다. 빨갛게 익은 사과를 보고서 이런 연상을 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그는 분명 사랑에 빠진 것이 틀림없을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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