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행복 / 유치환

샌. 2008. 1. 8. 09:26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창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더 의지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방울 연연한 진홍빛 양귀비 꽃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행복 / 유치환

 

그리스인들은 사랑을 네 종류로 나누었다고 한다. 에로스(Eros), 스토르게(Storge), 필리아(Philia), 아가페(Agape)가 그것으로 우리가 흔히 말하는 남녀간의 사랑은 에로스에 해당된다. 에로스는 육체적이고 성적인 매력에 이끌리는 사랑으로, 상대방을 소유하고 독점하고 싶은욕망이 강하게 나타난다.

 

사랑을 육체와 정신으로 나누어 구분 짓는 것이 모순이긴 하지만, 남녀 사이에 보통 플라토닉 러브라 부르는 정신적 사랑이 가능하기도 한 모양이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면 있을 수 없는 일처럼 신기하지만 실제로 영혼의 사랑으로 불리는 순결한 사랑이 존재했고, 또 현재도 존재하고 있을 것이다.

 

청마와 정운 사이의 사랑도 아마 이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그분들의 사랑 얘기는 한 편의 동화와 같다. 청마는 부인과 세 자녀를 가진 교육자로 20여 년 간 남몰레 정운을 사모하며 편지를 보냈다. 거의 매일 한 편씩 보낸 편지가 5천여 통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들의 사랑은 육체적이나 물질적 욕망을 극복한 순결한 사랑이었다고 전해진다.

 

그러나 현실로서의 사랑은 잔인한 측면이 있다. 나중에 청마의 가족들이 받았을 충격은 얼마나 컸을 것인가. 그리고 청마 본인의 갈등이나 죄책감또한 무시할 수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사랑에 대한 갈구를 죽을 때까지 경험한다. 평범한 부부간의 정이나 가정의 행복에서 만족하지 못하는어떤 새로운 사랑에 대한 환상을 갖고 있다. 다만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뿐이다.

 

청마의 이 시를 읽으면 정운에 대한 시인의 애틋한 사랑, 그리고 그리운 마음으로 매일 우체국에 들렀던 정경이 떠올라 가슴이 짠해진다. 남녀간에 서로 좋아하는 관계란 과연 무엇인가? 그리고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고 노래한 청마는 과연 진정으로 행복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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