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사랑에 답하여 / 정일근

샌. 2007. 12. 9. 11:09

수선화 해를 따라 도는 꽃인 걸

마당에 노란 수선화 피어서 알았다

가녀린 꽃대에 크고 무거운 꽃을 달고서

동쪽에서 서쪽으로 해를 따라 간다

달마는 마음 따라 동쪽에서 왔다지만

땅 속에 마음 묻은 수선화의 해바라기는

갈 수 없는 사랑의 지독한 형벌이다, 고

나는 오래전부터 수선화 꽃 뒤에 놓여있는

낡은 의자에 앉아 생각했다, 나도

그런 아픈 사랑한 적이 있었다, 고

해를 기다리는 말없는 꽃이나

사람을 기다리는 사람이나

같은 앉음새 같은 가부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노란 수선화 지면서 알았다

꽃은 마르면서도 해를 따라 가고

말라 바스라지면서도 저 수선화

뜨거운 해바라기는 멈추지 않았다

수선화 꽃 뒤에 놓아둔 의자도, 사실

누군가를 기다리겠다고 놓아두었지만

의자에 앉아 사람을 기다렸던 시간보다

비어두었던 시간 더 많았으니

나는 꽃처럼 사랑하지 못했다

나는 꽃처럼 사랑에 답하지 못했다

 

- 사랑에 답하여 / 정일근

 

옆에서 바라보기만 하던 수선화였다. 낡은 의자에 앉아 내가 기다린 것이 무엇인 줄은 몰랐다.

어느 날, 수선화의 해바라기가 마음을 아프게 하고, 그 향기가 코 끝까지 밀려온 날, 나는 알았다. 내가 기다린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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