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저녁놀 / 요시노 히로시

샌. 2007. 12. 1. 12:35

항상 그렇듯이

전철은 만원이었다

그리고

항상 그렇듯이

젊은이와 아가씨가 앉아 있고

노인은 서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가씨가 일어나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

허둥지둥 노인이 앉았다

고맙다는 말도 없이 노인은 다음 역에서 내렸다

아가씨는 앉았다

다른 노인이 아가씨 앞으로

옆쪽 틈새에서 밀려왔다

아가씨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나

다시 일어나

자리를

그 노인에게 양보했다

노인은 다음 역에서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내렸다

아가씨는 앉았다

두 번 일어난 일은 또 일어난다는 말 그대로

다른 노인이 아가씨 앞으로

또 밀려왔다

가엽게도

아가씨는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이번에는 자리를 양보하지 않았다

다음 역도

그 다음 역도

아랫입술을 꾹 다물고

긴장된 몸은 굳어졌고...

나는 전철에서 내렸다

몸을 힘을 주고 고개를 숙이고

아가씨는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난자가 된다

그건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타인의 괴로움을 자신의 괴로움처럼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착한 마음에 압박을 견디면서

아가씨는 어디까지 앉아 갈 수 있을까

아랫입술을 씹으며

괴로운 심정으로

아름다운 저녁놀도 바라보지 못한 채

 

- 저녁놀 / 요시노 히로시

 

전철 안의 평범한 풍경이 시로 변하니 애틋하게 가슴을 울린다. 누구나 이런 경험 있었을 것이다. 자리에서 일어서지도 못하고 좌불안석으로 앉아 있던 조마조마했던 기억들, 또한 그걸 바라보는 안타까운 마음들.... 착한 아가씨의 심정을 헤아리는 시인의 마음씨 또한 저녁놀보다 더 곱다.

 

언젠가 등산을 갔다가 교외선 열차를 서울로 돌아오고 있을 때였다. 앉아있는 한 아가씨 앞에 같은 일행의 서너명의 중년 남녀들이 서 있었다. 한 여자가 다리가 아프다고 투정을 했고, 남자는 계속 앉아있는 아가씨에게 미운 눈짓을 주었다. 나중에는 모두에게 들릴 정도로 요즘 젊은 것들이 이 모양이라며 핀잔을 주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 아가씨의 민망했을 마음이 옆에서 보기에 무척 아팠다. 아가씨는 자리 양보하지 않고 뻔뻔하게 앉아있는 젊은이의 모습이 아니었다. 우리는 왜 상대방을 좀더 배려해 줄 수 없을까? 내 입장보다는 남의 입장을 헤아리기에 우리는 왜 그렇게 인색한지 모르겠다.

 

요시노 히로시라는 일본 시인에 대해서는아는 게 없지만, 그러나 이 시 하나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고운 마음씨를 가진 시인인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이 시에 나오는 한 구절....

 

'착한 마음을 가진 사람은

언제 어디서나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수난자가 된다'

 

뻔뻔하고 당돌하게 살아가는 것보다는 난여전히 여리고 착한 마음을 지닌 사람으로 살아가고 싶다. 비록 스스로의 짐으로 괴로움을 당하고 힘들지라도 난 여전히 곱고 착한 사람이 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