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샌. 2007. 11. 26. 13:03

왜 나는 조그마한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 대신에 왕궁의 음탕 대신에

50원짜리 갈비가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파병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30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14야전병원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마를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씩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씩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20원 때문에 10원 때문에 1원 때문에

우습지 않으냐 1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오래 전에 쓰인 이 시를 읽으면서 내 삶의 천박함과 속물성을 다시 돌아본다. 삶의 본질은 건드리지도 못하고 껍데기에만 천착하는 내 삶의 관성을 슬프게 바라본다.

 

자신의 이익이나 신변잡사에는 민감하게 반응하면서, 큰 일에는 침묵하고 마는 방관자가 누구인가? 현실구조적인 문제는 애써 외면하고 작은 일에는 분노하는 내 비겁함과 옹졸함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사는 것이 다 그런 것이라고 쓸쓸하게 말하지 말자. 지금은 시인의 냉정한 자기 비판을 다시 배워야 할 때다.

 

'모래야 나는 얼마큼 적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얼마큼 적으냐

정말 얼마큼 적으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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