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생명의 서 / 유치환

샌. 2007. 11. 15. 15:51

나의 지식이 독한 회의(懷疑)를 구(救)하지 못하고

내 또한 삶의 애증(愛憎)을 다 짐지지 못하여

병든 나무처럼 생명이 부대낄 때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沙漠)으로 나는 가자

 

거기는 한 번 뜬 백일(白日)이 불사신같이 작열하고

일체가 모래 속에 사멸한 영겁(永劫)의 허적(虛寂)에

오직 알라의 신(神)만이

밤마다 고민하고 방황하는 열사(熱砂)의 끝

 

그 열렬한 고독(孤獨) 가운데

옷자락을 나부끼고 호올로 서면

운명처럼 반드시 '나'와 대면(對面)케 될지니

하여 '나'란 나의 생명이란

그 원시의 본연한 자태를 다시 배우지 못하거든

차라리 나는 어느 사구(沙丘)에 회한 없는 백골을 쪼이리라

 

- 생명(生命)의 서(書) / 유치환

 

젊었을 때 이 시의 강렬한 시어들을 무척 좋아했다. '독한 회의' '작열' '영겁의 허적' '열렬한 고독' '회한 없는 백골' 등과 함께, '저 머나먼 아라비아의 사막으로 나는 가자'라는 구절을 읊을 때는 심장이 마구 쿵쾅거렸다. 그것을 내 젊은 시절에 경험했던 진리에 대한 치열한 갈망이었다고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때는 '진리'나 '순수' 같은 말만 들어도 눈물이 나올 정도로 그것에 대한 열망이 강렬했다.

 

그로부터 30여 년이 흘러 내 젊은 가슴을 뛰게 했던 비장한 의지는 많이 사그러졌지만, 그래도이 시를 읽으면가슴이 뜨거워지는 것은 여전하다. 그것은 내가 아직 살아있음을 확인해 주고 있다. 시인의 외침은 지금 나에게도 계속 현재진행형이다.

 

진리에의 도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다. 그 길은 맨발로 걸어야 하는 자갈밭이고, 열사의 사막길이다.회의와 절망과 만나고 정면 대결하면서 나아가야 하는 고독과 고통의 길이다.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좁은 길'의 의미도 같은 맥락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우리 주변의기독교는 너무 쉬운 구원과 축복으로 경도되어 있어 안타깝다.

 

얼마 전 신문에 요사이 유행하는 명상이 웰빙 차원에서 선전되고 이용되고 있다는 현실이 보도되었다. 자본주의는 명상도 종교도 모두 자본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이용한다. 보도에 따르면 명상의 목적은 자기를 아는 것과 자기비움일 텐데, 도리어 거꾸로 자기 만족과 자기 충족의 수단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의 종교도 마찬가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종교는 사막의 길을 가리켜야 한다고, 세상의 불의에 대해 예민해지고 그 옳지 않음에 대해 '아니오'를 하며 돌아설 수 있는 각자(覺者)의 길을 가도록 해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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