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텅 빈 나 / 오세영

샌. 2007. 11. 10. 09:05

나는 참 수많은 강을

건넜습니다

강을 건널 때마다 거기엔

이별이 있었고

이별을 가질 때마다 나는 하나씩

내 소중한 것을 내주었습니다

헤엄쳐 건너면서

옷을 벗어주었습니다

뗏목으로 건너면서

보석들을 주었습니다

배로 건너면서

마지막 남은 동전조차 주어버렸습니다

 

나는 참 수많은 산들을

넘었습니다

산을 넘을 때마다 거기엔

이별이 있었고

이별을 가질 때마다 나는 하나씩

내 소중한 것들을 건네주었습니다

벼랑에 매달리면서 슬픔을 주었습니다

비탈에 오르면서 기쁨을 주었습니다

고개를 넘으면서는 마침내

당신에 대한 그리움까지도

주어버렸습니다

 

나는 참 수많은 산과 강을

넘고 건너왔기에

내겐 이제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더불어

당신께 드릴 것이 없습니다

나는 텅 비어 있으므로

지금 나는 내가 아닙니다

아무래도 나는 이제 아무 것도 아닌 나를

당신께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당신이

텅 빈 나를 더 반기실 줄

아는 까닭에....

 

- 텅 빈 나 / 오세영

 

나는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며 무엇을 배웠는가? 산에서는 기화요초를 탐하고, 강에서는 예쁜 조약돌에만 한 눈을 팔지 않았는가? 그래서 내 배낭과 호주머니에는 욕심의 물건들만 가득해, 내 허리는 휘어지지 않는가?

 

벌써 이만큼 걸어왔는데도, 아직도 나는 버리기에 익숙하지 못하다. 버리려고는 하나 뜻대로 되지 않는다. 미련과 두려움이 내 발목을 붙잡고 있다.

 

당신을 만날 때, 당신은 내 텅 빈 마음을 가장 사랑하실 줄 압니다.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고, 심지어 당신께 드릴 마음 조차 없어진 나를 당신은 가장 반기실 줄 압니다.

 

시인처럼 나 역시 텅 빈 마음 하나만 가지고 당신 앞에 서고 싶습니다. 그런 나를 당신께 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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