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깨우치다 / 이성부

샌. 2007. 11. 12. 20:31

정상에서 찍은 사진 들여다볼 때마다

이 산에 오르면서 힘들었던 일 사진 밖에서도 찍혀

나는 흐뭇해진다 꽃미남처럼

사진 속의 나는 추워 떨면서 당당한 듯 서있는데

먼 데 산들도 하얗게 웅크리고들 있는데

시방 나는 왜 이리 게으르게 거들먹거리기만 하는가

눈보라 두눈 때려 앞을 분간할 수 없고

세찬 바람에 자꾸 내 몸이 밀리는데

한걸음 두걸음 발 떼기가 어려워 잠시 주저앉았지

내 젊은 한시절도 그런 바람에 떠밀린 적 있었지

밤새도록 노여움에 몸을 뒤치다가

책상다리 붙들고 어둠 건너쪽 다른 세상만 노려보다가

저만치 달아나는 행복 한 줌 붙잡을 엄두도 내지 못했지

능선 반대편으로 내려서서 나도 몸을 피하면

언제 그랬냐 싶게 바람 잔 딴 세상

편안함에 나를 맡겨 제자리 걸음만 하다가

가야할 길이 많은데 마음만 바쁘다가

안되겠다 싶어 다시 눈보라 속으로 나아갔지

어려움의 되풀이가 나에게 새로운 눈 뜨게 했음인가

봉우리에 올라가 되돌아보니

칼바람 속에서라야 내 살아 있음의 기특함이 잘 보이고

그것이 큰 재미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자꾸 사진 밖으로 펼쳐지는 풍경을 보면서

눈 많이 오는 날

이 산으로 다시 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 깨우치다 / 이성부

 

시집을 사면 마음에 드는 시 몇 개 안되듯, 하나의 시도 대개 그 안에 있는 노래 중의 한 구절 때문에 좋아하게 된다. 이 시도 마찬가지다.

 

'칼바람 속에서라야 내 살아 있음의 기특함이 잘 보이고...'

 

시인은 다시 눈보라 치는 산으로 가야겠다고 한다. 마음에 찍힌 사진 한 장이 편안한 평지에서의 삶을 떠나 세찬 바람 속으로의 길로 들어서게 한다. 여기서 칼바람은 편안한 현실을 등진 자가 마주치게 되는 삭풍이 아닐까. 그런 연후에라야 내 살아 있음의 기특함이 느껴지고, 그런 경험이야말로 우리가 존재하는의미가 아닐까.

 

인생이란 자기만의 의미를 찾아 길 떠나는 여정이다. 길 떠나는 자는 눈보라 치는 벼랑을 오르고, 열사의사막을 지나야 한다. 그 길에서 마주치게 되는 어려움이나 고통이야말로 우리를 눈 뜨게 하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언젠가 나도 시인과 같은 고백을 할지 모른다.

 

'안되겠다 싶어 다시 눈보라 속으로 나아갔지

어려움의 되풀이가 나에게 새로운 눈 뜨게 했음인가

봉우리에 올라가 되돌아보니

칼바람 속에서라야 내 살아 있음의 기특함이 잘 보이고

그것이 큰 재미라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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