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읽는기쁨

패밀리 / 정일근

샌. 2007. 11. 20. 15:02

조심해! 자연에도 패밀리가 있다. 이딸리야 마피아나 러시아 마피아와 같은 패밀리가 있다. 자연의 패밀리란 사람의 족보로 치자면 같은 항렬자를 쓰는 형제나 사촌쯤 되는, 그러나 사람과는 다른, 사람의 족보와는 다른, 자연의 인드라망이 있다.

동물의 왕인 호랑이와 밀림의 왕인 사자는 고양이의 패밀리다. 고양이가 형이고 호랑이와 사자는 아우다. 은현리에 와서 도둑고양이에게 야단을 쳐보라. 달아나기는 커녕 느릿느릿 왕의 걸음걸이로 걸어가며 빤히 쳐다보기까지 하는, 사람을 우습게 여기는 배경에는 도둑고양이에게 왕이 둘이나 있는 패밀리의 '빽'이 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흘레붙는 개에 대해 뜨거운 물을 뿌리며 방해해서는 안된다. 늑대, 은빛여우, 너구리가 개의 패밀리다. 가끔씩 개가 하이톤의 고독한 늑대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것은 자신의 패밀리가 누구인가를 목청 높여 알리는 것이다. 그건 또 자신들의 종족번식 방법에 대해 사람 패밀리가 존중해달라는 경고방송이다.

독야청청해서 외로울 것 같은 소나무에게도 전나무, 솔송나무, 가문비나무, 잎갈나무 같은 따뜻한 패밀리가 있다. 키 작은 벼들이 목에 힘주고 서 있는 것은 키 큰 대나무가 자신의 패밀리이기 때문이다.

국화는 코스모스, 과꽃, 해바라기, 민들레, 쑥부쟁이, 도깨비바늘이 제 패밀리다. 놀라지 마라. 국화는 국내에 400에 가까운 패밀리가 살고, 1000에 가까운 패밀리가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다. 쉿! 더 무서운 건 그 패밀리 밑으로 20,000이 넘는 국제적인 사조직이 지금 이 순간에도 가동중이다. 그럴 리야 없겠지만 국화 패밀리들이 파업을 한다면 지구촌에서 꽃구경하기는 힘들 것이다.

향기롭고 우아한 백합에게는 냄새가 고약하고 키가 작은 마늘, 양파가 패밀리다. 사람 같으면 창피해서 부정하거나 외면해버리지만 자연의 패밀리는 한번 패밀리는 영원한 패밀리다. 남극의 펭귄 부모는 영하 50도의 혹한 속에서 새끼를 살리기 위해 제 몸 아낌없이 먹이로 내주고 까마귀는 자신을 낳아 기른 어미 까마귀가 늙으면 먹이를 물어다주며 봉양한다.

자연의 패밀리가 볼 땐 지구에 살고 있는 패밀리 중에서 부모가 자식을 쓰레기처럼 내다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동네북처럼 두들겨패는 패밀리는, 패밀리끼리 싸우고 고소 고발하고, 총질하며 전쟁을 하는 패밀리는, 이름도 고상한 호모 싸피엔스, 스스로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그 패밀리뿐이다. 문자를 가지고 시를 가지고 있다는.

- 패밀리 / 정일근

패밀리(family)는 동식물을 분류할 때 쓰는 '과(科)'의 영어 이름이다. 사람 패밀리는 자연 패밀리의 한 부분일 뿐이다. 그러나 마치 모든 패밀리의 주인이라도 되는 양 뻐기며 행동하는 걸 보면 인간 패밀리가 똑똑한 건지 어리석은 건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사람 패밀리는 지능을 무기로 주인 노릇을 하고 있지만 긴 지구의 역사에서 보면 잠깐 나타났다 사라지는 한 순간에 불과하다. 인간 패밀리가 배워야 할 것은 자기의 '주제 파악하기'일 것이다.

영리하다는 사람 패밀리가 하는 짓을 보면이해되기 어려운 부분이 많다. 어떨 때는 만물의 영장이 아니라 만물의 파괴자나 말썽꾸러기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곧 대선이 다가오지만 사악한 지도자들의 사탕발림의 말에 너무나 쉽게 속아넘어가는 것도 그렇다. 호모 싸피엔스라는 말로 불릴 만한 자격이나 되는 걸까?

자연 패밀리, 사람 패밀리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대자연의 한 패밀리다. 서로서로 아껴주고 오손도손 살아가야 할 같은 패밀리다. 그러나 사람 패밀리는 우선 자기들 사람들 사이에서 가까이 지내는 법을 배워야 할 것 같다. 인종이나 종교, 이념으로 구별짓고 무시하고 차별하는 나쁜 버릇부터 고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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